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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有身-sakkāya)의 보충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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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피스님
댓글 0건 조회 29회 작성일 26-02-02 18:05

본문

책 『나는 불교를믿는다』 제1부 제1장 들어가는 글

 

▣ 유신(有身-sakkāya)의 보충 설명


「“anamataggoyaṃ bhikkhave, saṃsāro. pubbā koṭi na paññāyati avijjānīvaraṇānaṃ sattānaṃ taṇhāsaṃyojanānaṃ sandhāvataṃ saṃsarataṃ. 비구들이여, 윤회는 시작이 알려지지 않는 것이다. 무명(無明)에 덮이고 애(愛)에 묶여서 옮겨가고 윤회하는 중생들에게 처음 시작점은 알려지지 않는다.」(SN 15-시작이 알려지지 않음 상윳따)의 경들 등.


무명과 애가 해소되지 않은 존재들은 몸으로 가는 현상에 의해 윤회하는데, 언제부터 몸으로 가는 현상이 발생하였는지 즉 윤회의 시작점은 무명과 애가 해소되지 않는 한 알려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몸으로 가지 않은 마음[심(心)-의(意)-식(識)(SN 12.61-배우지 못한 자 경)] 즉 무명과 애에 구속되지 않는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DN 11-께왓따 경)과 (MN 49-범천의 초대 경)은 「viññāṇaṃ anidassanaṃ anantaṃ sabbato pabhaṃ 식(識)은 속성이 없고, 한계가 없고, 모든 관점에서 빛난다.」고 하는데, 무명과 애의 구속 이전의 식(識)의 상태를 알려줍니다. 하지만, 무명에 덮이고 애에 묶이는 때로부터 식(識)은 욕계(慾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중생 세상에 머물러서 한계가 생기고(AN 3.77-존재 경1), 의도와 기대라는 속성이 생기면서(AN 3.78-존재 경2), 빛을 잃고 몸으로 가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pabhassaramidaṃ, bhikkhave, cittaṃ. tañca kho āgantukehi upakkilesehi upakkiliṭṭhan”ti. 비구들이여, 이 심(心)은 빛난다. 그러나 그것은 손님인 오염원에 의해 오염되었다.


“pabhassaramidaṃ, bhikkhave, cittaṃ. tañca kho āgantukehi upakkilesehi vippamuttan”ti. 비구들이여, 이 심(心)은 빛난다. 그리고 그것은 손님인 오염원으로부터 벗어났다.」 (AN 1.41-50-잘못된 지향 품)


그래서 몸은 중생의 모든 문제의 근원입니다. 몸 때문에 죽고 태어나 윤회하고, 몸 때문에 늙고 병드는 등 모든 괴로움을 겪습니다. ― 「sārīrikānaṃ kho etaṃ, bhikkhave, dukkhānaṃ vedanānaṃ adhivacanaṃ yadidaṃ ‘pātālo’ti. assutavā, bhikkhave, puthujjano sārīrikāya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socati kilamati paridevati urattāḷiṃ kandati sammohaṃ āpajjati. 비구들이여, ‘깊은 구렁’이라는 것은 몸에 속한 그 괴로운 느낌들을 지시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몸에 속한 그 괴로운 느낌에 닿아 있는 배우지 못한 범부는 슬퍼하고 힘들어하고 비탄에 빠지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고 당황한다.」(SN 36.4-깊은 구렁 경)


이렇게 마음에게 몸이 있는 상태 또는 몸과 함께한 존재 상태를 지시하는 용어가 유신(有身-sakkāya)입니다. 그래서 유신(有身)은 나를 지칭하는 말이고, 삶의 과정을 누적하여 오취온(五取蘊)이 되고, 그 활성화된 삶을 식(識)과 명색(名色)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식(識)과 명색(名色)의 서로 조건 됨과 생존 기간의 불균형 때문에 윤회합니다(DN 15.1-대인연경, 연기). 이것이 무명과 애의 구속 때문에 몸에 제약된 존재의 삶입니다.


그런데 수명이 긴 신(神)들은 이런 몸의 제약을 인식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출현하여 무명과 애의 해소를 위한 법을 설하면, 그 법을 듣고서 존재의 무상(無常)을 알게 되고 스스로 유신(有身)에 속해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SN 22.78-사자 경). 몸은 중생인 한 예외가 없는 존재의 구성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명과 애를 해소하여 더 이상 몸으로 가지 않는 마음은 어떻게 됩니까? 깨달아 윤회에서 벗어나 몸의 제약에서 벗어난 때의 마음은 어떤 존재 상태를 가집니까?


이 질문의 답은 무기(無記)입니다. 무명에 덮이고 애에 묶인 중생들의 사유가 미치지 못하는 영역은 오직 무명과 애의 해소를 통해서만 직접 확인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으로 가지 않게 된 때의 존재 상태는 이런 네 가지 무기(無記)로 설명됩니다. ― 「여래는 죽은 뒤에 ‘①존재한다. ②존재하지 않는다. ③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④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의 어떤 경우에도 그렇다고 설명하지 않음」(SN 44.1-케마 경) 등.


이런 무기의 영역에 있는 즉 몸으로 가지 않은 마음[심(心)-의(意)-식(識)]은 신과 사람들 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마라 또한 그 마음을 찾을 수 없습니다. 


• 「evameva kho, bhikkhave, ucchinnabhavanettiko tathāgatassa kāyo tiṭṭhati, yāvassa kāyo ṭhassati, tāva naṃ dakkhanti devamanussā, kāyassa bhedā uddhaṃ jīvitapariyādānā na naṃ dakkhanti devamanussā”ti. 이처럼, 비구들이여, 여래는 존재로 이끄는 도관(導管)이 끊어진 몸으로 남아 있다. 이 몸이 남아 있을 때까지 신과 사람들은 그를 본다. 몸이 무너져 생명이 다하면 신과 사람들은 그를 보지 못한다.」(DN 1-범망경)


• 「“eso kho, bhikkhave, māro pāpimā godhikassa kulaputtassa viññāṇaṃ samanvesati — ‘kattha godhikassa kulaputtassa viññāṇaṃ patiṭṭhitan’ti? appatiṭṭhitena ca, bhikkhave, viññāṇena godhiko kulaputto parinibbuto”ti. 비구들이여, 이 마라 빠삐만뜨가 좋은 가문의 아들 고디까의 식(識)을 찾고 있다. ― ‘좋은 가문의 아들 고디까의 식(識)은 어디에 머물렀을까?’라고. 그러나 비구들이여, 좋은 가문의 아들 고디까는 식(識)이 머물지 않음에 의해 완전히 열반했다.」(SN 4.23-고디까 경)/(SN 22.87-왁깔리 경)


한편, 이렇게 ‘유신(有身)은 마음에게 몸이 있는 상태’라는 해석에 타당성을 부여해 주는 교리가 있는데,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식(識)의 육계(六界-여섯 가지 요소)입니다.


유신(有身)은 나 즉 사람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과 육사외도(六師外道)에 포함되는 아지따 께사깜발리는 사람을 다르게 정의합니다.


• 아지따 께사깜발리 ― 「cātumahābhūtiko ayaṃ puriso, - 사람은 사대(四大)로 되어있다.」(DN 2-사문과경)


• 부처님 ― 「chadhāturo ayaṃ, bhikkhu, puriso’ti - 비구여, 사람은 육계(六界)로 되어있다.」(MN 140-요소의 분석 경)


지(地)-수(水)-화(火)-풍(風) 사대(四大) 즉 색(色-물질)이 사람을 구성하는 일차적 요소라는 아지따 께사깜발리의 주장은 유물론(唯物論)-단멸론(斷滅論)-단견(斷見)입니다. 식(識-마음)은 색(色)으로 구성되는 사람의 삶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이차적 요소라는 해석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관점은 다릅니다. 부처님은 식(識)이 색(色)과 대등하게 삶을 구성하는 일차적 요소라는 점을 말해주는데,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식(識)의 육계(六界)로 구성된 사람의 선언입니다. 이때, 공(空-ākāsa-공간)은 사대(四大)의 결합인 사대조색(四大造色)을 구성하는 요소이므로 물질에 속합니다. 그래서 육계(六界)는 색(色)과 식(識)의 조성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사람이 색(色)과 식(識)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선언을 통해 식(識-마음)이 색(色-몸)과 함께하는 상태가 사람 즉 나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바로 유신(有身)입니다


그리고 색(色-몸)과 식(識-마음)이 함께하는 삶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수(受-경험)-상(想-경향)-행(行-형성작용)이 함께 누적된 오온(五蘊)-오취온(五取蘊)으로 나의 존재는 다시 확장되는데, 유신(有身)이 곧 오취온 (五取蘊)이라는 설명입니다. ― 「katamo ca, bhikkhave, sakkāyo? pañcupādānakkhandhātissa vacanīyaṃ. katame pañca? seyyathidaṃ — rūpupādānakkhandho, vedanupādānakkhandho, saññupādānakkhandho, saṅkhārupādānakkhandho, viññāṇupādānakkhandho. ayaṃ vuccati, bhikkhave, sakkāyo. 비구들이여, 무엇이 유신(有身)인가? 오취온(五取蘊)이라고 말해야 한다. 무엇이 다섯인가? 말하자면, 색취온(色取蘊), 수취온(受取蘊), 상취온(想取蘊), 행취온(行取蘊), 식취온(識取蘊)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유신(有身)이라고 불린다.」(SN 22.105-유신(有身) 경)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확인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정(正定-바른 삼매)을 닦는 과정의 제사선(第四禪) 위에서 지(知)와 견(見)으로 심(心)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하면 분명히 알게 됩니다. — 「‘ayaṃ kho me kāyo rūpī cātumahābhūtiko mātāpettikasambhavo odanakummāsūpacayo aniccucchādana-parimaddana-bhedana-viddhaṃsana-dhammo; idañca pana me viññāṇaṃ ettha sitaṃ ettha paṭibaddhan’ti 나의 이 몸은 물질이어서 사대(四大)로 구성된 것이고, 부모에 속한 것에서 생겨난 것이고, 밥과 응유가 집적된 것이고, 무상하고 쇠퇴하고 부서지고 해체되고 흩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이 식(識)은 여기에 의지하고 여기에 묶여있다.’라고.(DN 2-사문과경)


이렇게 식(識-마음)은 무명(無明)에 덮이고 애(愛)에 묶인 사람들에게는 잘 확인되지 않지만 바른 공부를 통한 삶의 향상과정에서 색(色-몸)에 의지하고 묶인 형편을 알게 되고, 더 나아가 의지하고 묶이기 이전의 그 존재성이 확인됩니다. 그때 무명과 애(愛)의 구속을 해소하는 깨달음에 의해 몸의 제약에서 벗어나 해탈하여 윤회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확인되는 식(識)은 삶의 과정을 누적하며 변화하는 연기(緣起)된 식(識)이어서, 참된 것 즉 아(我-attan/atman)라고 주장하는 상견(常見)과도 차별됩니다.

 

● 유신견(有身見-sakkāyadiṭṭhi) ― 유신(有身)에 대한 (왜곡된) 견해  

상(常)-락(樂)-아(我)의 무명(無明)의 번뇌[무명루(無明漏)] 때문에 유신(有身)에 대해 바르게 보지 못하고 참된 존재[아(我)]라고 보는 견해 즉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오온(五蘊)을 아(我)로부터 관찰할 때 생기는 왜곡된 견해 ⇒ (MN 44-교리문답의 작은 경) 참조 

※ 경에서 diṭṭhi는 대부분 무명(無明)과 애(愛)에 의한 중생의 견해를 지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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