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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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불교인가?
불교방송 라디오 「무명을 밝히고 - 금요 논강」 2019년 8월 9일과 8월 30일의 토론에서 사회자의 질문에 대한 해피 스님의 대답 부분을 정리하였습니다.
• ‘무명을 밝히고’ - 「금요 논강(論講), 무엇이 불교인가?」 첫 번째 방송
• ‘무명을 밝히고’ - 「금요 논강(論講), 무엇이 불교인가?」 두 번째 방송
해피스님 특강 - 무엇이 불교인가(1)(부산불교의사회 190819) ☞ https://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6_02&wr_id=18
해피스님 특강 - 무엇이 불교인가(2)(부산불교의사회 190820) ☞ https://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6_02&wr_id=20
[사회자] 불교의 끊임없는 혁신과 발전을 위해서는, 불교가 지향해야 하는 진정한 가치와 바람직한 실천 상에 대해서 사부대중이 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재 한국불교의 모습에서 잘못된 건 없는지 되돌아보고, 한국불교의 미래를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다각적으로 모색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오늘부터 한국불교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가지려고 하는데요,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무엇이 불교인가’를 주제로 토론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사회자] 1-1. 무엇이 불교인가? 이 질문은 무엇이 불교의 본래 모습이 아닌가, 하는 문제와 연관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오늘날의 한국불교는, 불교의 본질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해피 스님] 먼저, (SN 20.7-쐐기 경)은 이 주제에 정곡을 찌르는 답을 줍니다. 한국 불교의 현실과 잘 견주어 보아야 할 지적이고, 나는 어떤 쪽에 속하는 불교 신자인지 고민해 보아야 할 가르침입니다.
미래에, ①여래에 의해 말해진, 심오하고, 심오한 의미를 가진, 세상을 넘어선, 공(空)에 연결된 가르침이 설해질 때 듣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고, 무위(無爲)의 앎을 위해 심(心)을 확고히 하지 않고, 그 법들을 일으켜야 하고 숙련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비구들이 있을 것인데, 그들은 ②시인이 짓고, 아름다운 문자와 표현을 가진 시이고, 외도의 제자들이 말한 가르침들이 설해질 때 듣고, 귀 기울이고, 최고의 앎을 위해 심(心)을 확고히 하고, 그 법들을 일으켜야 하고 숙련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지적 위에 이 가르침이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렇게 공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 「‘여래에 의해 말해진, 심오하고, 심오한 의미를 가진, 세상을 넘어선, 공(空)에 연결된 가르침이 설해질 때 우리는 듣고, 귀 기울이고, 무위(無爲)의 앎을 위해 심(心)을 확고히 하고, 그 법들을 일으켜야 하고 숙련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참으로 이렇게 공부해야 한다.」
이제, 오늘날의 한국불교가 불교의 본질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본질의 측면에서 말해 보겠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한 뒤 법을 설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장면에서 ‘내가 성취한 이 법의 두 가지 토대’를 설명하는데, ①여기(중생 세상)에서의 조건성인 연기(緣起) 즉 십이연기(十二緣起)와 ②열반(涅槃)입니다.
첫 번째 토대인 연기(緣起)는 그 출발에서 심(心)의 형성 즉 ‘심(心)은 생겨나는 것’이라는 점과 심(心)을 생겨나게 하는 조건 관계를 설명합니다[심행(心行)=상(想)-수(受) → 무아(無我)]. 그런데 한국불교의 범주 안에서 공부하는 분들과 대화할 때, 가장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심(心)이 생겨나는 것이라는 관점입니다. 심(心)은 참된 것이라는 믿음 위에서 불교에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참된 것 즉 생겨나지 않은 것을 나타내는 용어가 아뜨만[atman-아(我)]이라는 점을 분명히 짚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주장은 불교의 정체성 즉 무아(無我)에 어긋납니다.
또한, 두 번째 토대인 열반에 대해 니까야는 무상(無常)의 가라앉음에 의한 락(樂)과 무아(無我)라고 정의합니다. 하지만, 한국불교의 범주에서 공부하는 분들에게 열반은 상(常)-락(樂)-아(我)-정(淨)의 특성을 가지는 것으로 다르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열반사덕(涅槃四德)]. 이때, 상(常)-락(樂)-아(我)-정(淨)은 힌두교에서 주장하는 범(梵)과 아(我)의 특성이어서 힌두화된 불교의 한 측면을 드러낸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열반(涅槃)의 정의의 차이는 목적지 즉 부처님에 의지해서 도착하는 자리가 다르다는 점에서 가볍게 보지 않아야 합니다.
• 존재[법(法)]에 대한 오해 ― 상(常)-락(樂)-아(我)-정(淨)
• 조건적인 것[행(行)]의 실상 ―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
• 열반(涅槃)의 실현 ― [무상(無常)의 가라앉음에 의한] 락(樂)-무아(無我)
이렇게 부처님이 성취한 법의 두 가지 토대 모두에서 한국불교는 부처님의 설명을 정반대의 방향으로 벗어나 있다[①생겨나지 않는 심(心)에 의한 ②상락아정 (常樂我淨)의 열반(涅槃)을 추구 ― 거짓으로 시작하고, 거짓을 지향]는 것이 현재 한국 불교가 불교의 본질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에 대한 진단이라고 하겠습니다.
[사회자] 1-2. 오늘날 한국불교의 중요한 흐름 가운데 하나가 니까야를 중심으로 하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관심을 돌리는 경향이 아닐까 하는데요. 그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해피 스님] 먼저 채근담(菜根譚)의 한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사궁세축지 (事窮勢蹙之) 당원기초심(當原其初心) 궁지에 몰리게 되면 마땅히 초심으로 돌아가라.」 인데, 지금 한국불교의 형편이 궁지에 몰린 것인지 아닌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겨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흐름의 변화는 과학의 힘 덕분일 것입니다. 과학이 도와주지 않던 시절에는 니까야라는 공부가 한국불교의 관심(chanda) 영역에 있지 못했는데, 출판과 인터넷 등 과학의 힘으로 우리 삶의 영역에 들어와서 만나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만나고 보니 이것이 정등각(正等覺)의 가르침이고, 삶의 심오함의 끝에 닿아 근본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르침이어서, 누구든지 선입관 없이 만나기만 하면 동화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오죽하면, 부처님 당시에도 외도들은 부처님을 ‘개종시키는 요술쟁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는데, 만나기만 하면 동화되고 믿음을 일으켜 불교 신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과학의 힘 덕분에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으로의 니까야가 우리에게까지 닿았고, 진리인 그 가르침이 가지는 위력 때문에 마치 요술쟁이처럼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당기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놓치면 안 되는 것은 부처님이야말로 불교가 가지고 있는 비장의 무기요, 최선의 대응책이라는 것인데, 궁지에 몰린 한국불교가 돌아갈 자리에서 그 역량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회자] 2-1. 그러면, 무엇이 불교인가? 불교의 참모습에 대해서 말씀 나눠보도록 하죠. 경율론 삼장... 혹은 팔만사천법문으로 이야기되는 부처님의 방대한 가르침 가운데 우리가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해피 스님] 이 주제는 공감의 문제를 전제하고 답변드려야 하겠습니다만, 당연히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교(佛敎) 즉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당신의 가르침이 더할 바도 뺄 바도 없이 설해진 완전한 가르침이라고 선언하는데, 이런 선언이 바로 정등각(正等覺)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선언에 대한 확고함이 없으면 불교는 유지될 수 없고, 또한, 여기에서 달라지는 것은 발전이 아니라 변질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할 바도 뺄 바도 없이 완전한, 교리적 충돌이 없는 공부 영역을 1차 결집의 내용으로 간주하여 공부의 기준으로 삼는데, 이때, 불교는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확정적 결론을 제시해 줍니다.
• 율장(律藏)에 속한 마하 위방가(비구 227계)-비구니 위방가(비구니 311계)
• 경장(經藏)에 속한 디가 니까야-맛지마 니까야-상윳따 니까야-앙굿따라 니까야 & 쿳다까 니까야의 일부(숫따니빠따-법구경)
[사회자] 2-2. 경전을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가르침을 기준으로 불설, 비불설로 나누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해피 스님]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일까 아니면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하지 않은 가르침일까의 문제라고 해야 할 텐데요, 다 아는 이야기이니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보통 역사적-형식적[말-입]으로는 직설이 아니지만, 사상적-내용적[뜻-마음]으로는 불교라는 입장을 접하게 되는데, 이런 접근에 대해 니까야의 입장에서도 사상적-내용적으로의 동질성을 인정할 수 있는지는 더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석된 뜻과 마음이 과연 부처님의 뜻과 마음이라고 누가 담보할 수 있는지의 문제 제기라고 하겠습니다.
불교는 사는 이야기여서 삶에 대한 완전한 해석 즉 삶의 심오함의 끝을 설명하고 있는데, 역사적-형식적으로 부처님이 설하지 않은 것이 부처님과 동일하게 심오함의 끝에 닿았다고 인정하기에는, 이런 관점에서, 무리가 따른다고 판단됩니다. 앞에서 ‘①생겨나지 않는 심(心)에 의한 ②상락아정(常樂我淨)의 열반(涅槃)을 추구’하는 현상을 살펴보았지만, 정등각(正等覺)이신 그분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는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누가 어떤 이야기를 진리라고 말할 때, 그 말씀이 부처님의 말씀에 부합해서 내 삶의 지표로 삼고, 이끌려도 좋은가에 대한 판단의 문제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이때, 판단은 각자의 기준의 문제이고, 자기의 기준 위에서 경(經)과 율(律)에 견주어야 할 것입니다. 니까야의 관점에서 부처님은 당신이 설한 법(法)과 율(律)이 우리의 스승이 될 것이라고 유언하는데, 법과 율에 대해 누구에게 듣더라도 경과 율에서 견줄 것을 지시합니다. 이때, 부처님이 말하는 경과 율이 부처님 사후에 제3자에 의해 만들어질 경과 율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사회자] 2-3. 결국,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것과 변화를 가져와야 하는 것을 명확하게 나누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해피 스님] 이 주제에 대한 답은 (MN 104-사마가마 경)을 참고해야 합니다. 니간타의 교주 니간타 나타뿟따의 죽음 뒤에 발생한 니간타들의 혼란과 관련하여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뒤에 우리의 상가에도 갈등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는 걱정을 말하는데, 부처님은 이렇게 답합니다. ― 「아난다여, 생활에 관계되거나 계목(戒目)에 관계된 갈등은 사소한 것이다. 아난다여, 그러나 상가에 길이나 실천에 관한 갈등이 생긴다면, 그 갈등은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의 번영을 위한 것이 아니고, 신과 인간들의 손실을 위한 것이고, 괴로움을 위한 것이다.」
생활이나 계목은 삶의 향상을 위한 출가자들의 생활 규범입니다. 그리고 생활 규범은 시간과 지역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활에 관계되거나 계목(戒目)에 관계된 갈등은 사소한 것이고, 심지어, 부처님은 유언을 통해 ‘상가가 원한다면 나의 죽음 이후에는 소소한 학습계율들은 폐지해도 좋다.’라고 까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길은 삶의 향상을 이끄는 부처님의 방향입니다. 어떤 길을 걸어가는지에 따라 나아가는 방향이 달라지고, 다른 도착점에 닿게 됩니다. 그래서 길은, 부처님의 길을 뒤따르는 제자인 한, 달라지면 안 됩니다. 길의 차이는 스승의 차이고, 길의 변화는 다른 스승을 맞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길을 걷는 일 즉 실천도 길과 같은 비중을 가집니다. 길이 있어도 내가 직접 걷지 않으면 내 삶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길과 실천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그대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변화가 일어나면 그것은 다른 스승의 제자가 되는 것이고 삶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 길과 실천의 진리 ― 타협 불가능한 것 → 흔들리면 안 됨
• 자주(自洲)-법주(法洲) ― ‘스스로 섬이 되고, 법으로써 섬을 삼아라!’ → 법주(法洲)로서의 길과 자주(自洲)로서의 실천
[사회자] 3. 일반적으로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이 다른 종교와 차별되는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불교가 삶의 문제, 인간의 문제, 현실 사회의 문제에 답을 줄 수 있는지의 문제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해피 스님] 그렇습니다. 만약 불교가 삶과 인간 그리고 현실 사회의 문제에 답을 주지 못한다면 하나의 종교로서 지금까지 2,600년을 이어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저는 ‘한마디로 말하면, 불교는 행위 곧 업(業)이다.’라고 말합니다. 불교를 대표하는 개념으로는 심(心-마음)-락(樂-행복)-각(覺-깨달음)-정(正-바름) 등 여러 측면을 말할 수 있겠지만, 저는 행위 즉 업(業)으로 이런 개념들을 포괄하여 설명하는 것입니다. ― 「불교는 행위[업(業)]입니다. 행위의 뿌리에 심(心-마음)이 있고, 행위의 지향이 락(樂-행복)입니다. 행위의 기준이 정(正-바름)이며, 행위의 완성이 각(覺-깨달음)입니다.」
부처님을 업을 설하는 자(kammavāī), 결실을 설하는 자(kiriyavāī)라고 부르는 것이 이런 관점의 토대라고 할 것인데요, 어떤 업(業)이 어떤 과(果)와 보(報)를 가져오는지에 따른 삶의 제어가 곧 불교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 어떤 업(業) → 고(苦)의 과(果)와 보(報)
• 어떤 업(業) → 락(樂)의 과(果)와 보(報)
• 행위의 제어를 통한 삶의 향상 ― 「사념처(四念處) → 사마타-위빳사나」 : 사념처로 시작하고, 사마타-위빳사나로 완성되는 불교 수행
• 최상위 개념 ― 고(苦)와 고멸(苦滅) → 「괴롭니? 행복하자!, 아프니? 아프지 마!」
이렇게 삶의 이야기로 불교를 묶어주는 것이 행위 즉 업의 관점에서 ‘마음을 잘 다스려 바름을 실천하고 깨달음을 성취하여 완전한 행복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삶의 향상에 접근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삶과 인간 그리고 현실 사회의 문제에 대한 불교의 답이 됩니다. 이때, 불교 신자가 공부[교학+수행]를 통한 행위의 제어를 통해 아라한에 이르는 과정을 감안하면, 이런 구호도 유효합니다. ― 「행위의 중심은 현재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눈은 미래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어떻게 행위를 제어하여 ‘갈수록 괴로움은 줄어들고 행복은 늘어나는 삶을 살다가 죽어서는 하늘에 태어날까?’를 가르치는 불교야말로 삶의 문제, 인간의 문제, 현실 사회의 문제에 대한 답을 주는 종교라고 하겠습니다.
[사회자] 네, 오늘 논강에서는 ‘무엇이 불교인가?’를 주제로 말씀 나눴는데요, 불설(佛說)-비불설(非佛說)로 시작해서 희망의 종교로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