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불교인가?
페이지 정보

본문
왜 불교(佛敎-buddhism)인가? ⇒ (불교는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역할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과학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발전은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가 반드시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적 풍요의 이면에는 풍요에 따르는 부작용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과학과 풍요와 행복은 동일한 선상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학과 풍요와 행복 가운데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합니까?
아마도 행복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가장 많을 것입니다. 과학도 풍요도 결국은 행복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과정이 행복이라는 목적점을 향해 정확한 방향을 확보하지 못할 때, 풍요 가운데서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에 주목하면 답이 있습니다. 불교의 최상위 개념은 고(苦)와 고멸(苦滅) 즉 '괴로울 것인가, 행복할 것인가?'입니다. 내 삶에 어떤 문제 때문에 괴로움이 생겨나는지 정확히 알아서 그 문제를 해소함으로써 괴로움이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불교입니다.
불교는 과학을 중시합니다. (AN 8.54-디가자누 경)은 금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4가지 법을 말하는데, 첫 번째인 '근면을 갖춤'에 대해 '직업을 가지고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거기에 숙련되고 게으르지 않으며 그것을 완성할 수 있는 검증을 거쳐 충분히 실행할 수 있고 충분히 연구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숙련과 검증과 실행과 연구는 그대로 과학입니다. 불교신자라면 당연히 이런 과학적 시각에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불교는 풍요를 중시합니다. 같은 경에서 디가자누는 부처님에게 "대덕이시여, 저희는 자식들로 북적거리는 집에서 살고, 까시의 백단향을 경험하고, 꽃과 향과 화장품을 지니고, 금(金)과 은(銀)이 허용된, 소유하고자 하는 재가자입니다.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는 이런 저희에게 금생의 이익과 금생의 행복을 주고, 내생의 이익과 내생의 행복을 주는 법을 설해주십시오."라고 요청하고 부처님은 대답합니다. 말하자면, 다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도 죽어서는 하늘에 태어나는 방법을 부처님에게 묻고, 부처님은 그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재가자가 다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다복과 풍요의 뒤에 숨어있는 부작용을 조심해야 할 뿐입니다. 부처님은 부작용 없이 다복과 풍요를 가져오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이렇게 불교는 풍요를 중시하고, 불교신자라면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과학적 시각을 가지고, 다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몸에 구속된 중생이라는 현실 때문에 태어난 자는 늙어야 하고 병들어야 하고 죽어야 합니다. 죽으면 또 다시 다른 몸으로 옮겨감 즉 윤회하여 이런 삶을 반복하는 가운데 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 등의 괴로운 삶을 이어가게 됩니다.
과학적 시각 위에서도 괴로운 사람, 다복하고 풍요로움 위에서도 괴로운 사람, 그것을 넘어섰다 해도 생-노-병-사라는 존재의 문제에 속해 괴로운 사람. 중생이라고 불리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때, 부처님은 괴로움의 문제에 답을 줍니다. 과학의 발전 위에서도, 풍요로움 위에서도, 심지어 존재의 문제에 따르는 괴로움의 문제까지도 포함하여 부처님은 답을 줍니다.
왜 불교인가? 이것이 답입니다. '괴로울 것인가, 행복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행복을 이끄는 답이 있는 곳! 여기 불교입니다.
◐ 『불교입문(Ⅱ-사실) 여래는 이것을 깨닫고 실현하였다』 350쪽 참조
이때, 대승불교 권에서는 기세간에 대한 관심이 높고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비해, 니까야는 중생세간을 중심으로 세상을 서술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주된 관심 즉 최상위 개념이 고(苦)와 고멸(苦滅)이기 때문이라고 할 것인데, 세상이 어떤 것이든 불교의 목적은 그런 세상에서 행복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은 주목해야 합니다. 과학의 이름으로 물질 영역의 앎이 발전하면서 불교를 비롯한 종교 무용론이 세상에 만연하지만,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고 물질 문명의 이기들이 첨단화된다 해도 그것 때문에 행복한 사람만큼이나 그것 때문에 괴로운 사람도 있습니다. 기세간의 영역이라고 해야 하는 물질 문명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것이 주는 편리만으로 괴로움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괴로움의 소멸은 오직 부처님 가르침 즉 불교의 방법에 의해서만 완성됩니다. 기세간의 문제는 기세간을 전공하는 사람의 몫으로 하고, 중생세간의 문제 즉 괴로움의 해소는 불교가 전문입니다.
이렇게 불교는 괴로움의 소멸을 전공으로 합니다(불교의 최상위 개념 ‒ 고와 고멸). 부처님 가르침에 충실한 사람들은 괴로움의 소멸을 위한 전문가입니다. 중생세간으로의 나의 존재성, 내 삶의 문제를 해소하고 행복을 만드는 일은 기세간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불교에서 배워야 합니다.
불교는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역할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 하늘과 땅과 그 중간의 것들은 누가 만들었을까?
☞ nikaya.kr : 부처님 - 삶의 의미[태어남-깨달음-돌아감](근본경전연구회 해피법당-선엽스님의 마음정원 190519) https://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3_07&wr_id=84
2019년 5월 13일, 사월초파일이 하루 지난 다음 날 오후에 법당 가까이 송상현 광장으로 산보를 나갔습니다. 혼자 조용히 걷고 있는 나에게 어떤 사람이 다가와 “스님이신가요?”라고 묻습니다. 흔히 보지 못하는 옷을 입었으니 자주 듣는 질문이긴 하지만 왠지 심상치 않은 마음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불교 신자신가요?”라고 되물으니 아니라고 하며, 질문이 있다고 합니다. 말씀하시라 하니 “스님은 하늘과 땅과 그 중간의 것들을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합니다.
“나는 하늘과 땅과 그 중간의 것들을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하니 “그러면 하늘과 땅과 그 중간의 것들은 지금 어떻게 존재하고 있습니까?”라고 다시 묻습니다. “다양한 조건들이 결합해서 결과를 만드는 이치가 있습니다. 하늘과 땅과 그 중간의 것들은 그저 그렇게 다양한 조건들이 결합한 결과로 만들어져서 지금 존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내친김에 한마디를 더 보탰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보기 시작하면 그 만든 자는 누구일까 고민하고 찾아 나서게 되는데, 존재하지 않는 자를 거짓으로 설정하여 찾아가느라 삶을 낭비하게 됩니다. 참이 아닌 것에 집중하여 어떤 존재를 만들어 내고 그에게 세상을 만드는 권능을 부여하면 창조주라는 존재가 설정됩니다. 그렇게 설정된 창조주에 묶여서, 조건들의 결합으로 생겨나서 존재하는 것들을 그가 만들었다고 거짓으로 알게 됩니다. 그러나 거짓은 사실과의 괴리에 따르는 문제를 만듭니다. 아무리 그렇게 알고, 그러기를 바라도 사실 아닌 것이 그 앎, 그 바람을 원인으로 사실이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대는 완전한 깨달음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부처님의 깨달음을 말하는 것인데요,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은 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존재하는 것들의 문제를 바르게 알고, 적절히 대응하여 문제를 해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네, 스님. 고맙습니다. 하지만 하늘과 땅과 그 중간의 것들은 그분께서 만드셨다고 아시기 바랍니다.” ― 머리를 긁적이며 이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떠나갔습니다. 물론, 평생을 그분의 작품으로 알고 살아온 사람이 특별한 계기 없이 어느 순간 부정하고 사실의 편에 서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그도 그렇게 그분의 작품 됨을 받아들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간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사실 즉 존재하는 것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다양한 조건들의 결합에 의한 결과입니다. 부처님은 이런 이치를 무상(無常)이라고 말합니다. 무상(無常)한 것은 조건들이 제어되기 어려운 현실 때문에 불만족스럽게 만들어지고 유지되지 못하는데, 고(苦)입니다. 이렇게 무상(無常)하고 고(苦)인 것은 참된 것 즉 아(我)가 아닙니다. 그리고 삶의 과정에서 오염의 조건을 만나면 오염되는데, 부정(不淨)입니다. 이렇게 존재하는 것들의 실상은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입니다.
부처님은 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고 이끕니다. 이때, 지혜는 이렇게 정의되는데, 다양한 조건 가운데 번뇌의 영향 위에 있는 조건들이 결합하여 생겨나고 자라나는 현상과 번뇌들이 부서지는 만큼 그 조건들이 해소되어 줄어드는 현상의 측면에서 세상을 보게 하고, 존재하는 것들에 적용되는 사실을 꿰뚫어 불만족의 해소로 바르게 이끄는 힘 또는 기능입니다. ― 「“katamañca, bhikkhave, paññindriyaṃ? idha, bhikkhave, ariyasāvako paññavā hoti udayatthagāminiyā paññāya samannāgato ariyāya nibbedhikāya, sammā dukkhakkhayagāminiyā — idaṃ vuccati, bhikkhave, paññindriyaṃ. 비구들이여, 무엇이 지혜의 기능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지혜를 가졌다. 자라남-줄어듦으로 이끌고, 성스러운 꿰뚫음에 의해 괴로움의 부서짐으로 바르게 이끄는 지혜를 갖추었다. ― 이것이 비구들이여, 지혜의 기능이라고 불린다.」
지혜를 갖추는 공부[교학+수행]에 나서야 합니다. 자기가 공부되지 않으면 설정된 것이 주는 두려움에 묶여 거짓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면 사실과의 괴리가 부르는 불만족 즉 괴로움으로 이끌리게 되고, 삶은 정체됩니다. 그러므로 불교 신자라면, 지혜로써 알고 분명히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 「하늘도 땅도 그 중간의 것들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무상(無常)하다. 나는 그 조건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여 불만족을 줄여나갈 것이다. 이렇게 나의 삶은 완성을 향하여 향상할 것이다.」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