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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교를 믿는다』 제2부
Ⅴ. 업장소멸(業障消滅)
업장(業障)이란 말이 있습니다. 업의 장애인데, 몸과 말과 마음으로 잘못된 행위 [신업(身業)-구업(口業)-의업(意業)의 삼업(三業)]를 했을 때 삶에 미치는 나쁜 영향력 정도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런 나쁜 영향력의 해소를 업장소멸(業障消滅)이라고 합니다.
• 업장(業障) ― (불교) 삼장(三障)의 하나. 말, 동작 또는 마음으로 지은 악업에 의한 장애를 이른다. <표준국어대사전>
→ 삼장(三障) : (불교) 불도를 수행하여 착한 마음이 생기도록 하는 데 장애가 되는 세 가지. 번뇌장, 업장, 보장이다.
그렇다면 업장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지금 짓는 업의 영향력과 과거에 지은 업의 영향력입니다. 지금 짓는 업의 영향은 행위를 잘 제어해서 삶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는 방법으로 해소해야 하고, 과거의 업의 영향은 그 크기를 줄여 지금 나의 삶에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방법으로 해소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업장에 대한 명확한 정의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업장의 해소를 시도하지만, 대부분 지금 짓는 업의 영향을 과거의 업의 영향으로 간주하고 대응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또한, 과거의 업의 영향에 대한 대응방법도 정확하지 않아서 기대만큼의 업장소멸을 얻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1] 업(業)과 유(有-존재)
1. 업(業)을 잇는 존재
업은 행위인데, 번뇌[루(漏)]의 영향 위에 있는 중생의 삶에서는 과(果)와 보(報) 즉 행위에 따르는 고(苦)-락(樂)의 결실[과(果)]이 생겨나서 삶의 과정에서 경험됩니다[보(報)].
업은 삿된 업과 바른 업으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바른 업은 ①번뇌와 함께하고 공덕을 만들고 몸과 생명에 대한 애착을 익게 하는 업과 ②번뇌 없고 세상을 넘어섰고 길의 요소인 성스러운 업으로 다시 나뉩니다(MN 117-커다란 마흔의 경). 이때, 삿된 업은 고(苦)를 만들고, 바른 업(業)은 락(樂)을 만듭니다. 락(樂)은 ①번뇌와 함께하는 중생의 영역[유위(有爲)]에 속한 락(樂)이 있고, 특별히 ②번뇌와 함께하지 않는 해탈된 삶의 영역[무위(無爲)]에 속하는 락(樂)이 있는데 해탈락(解脫樂) 또는 열반락(涅槃樂)입니다.
번뇌와 함께하는 업에는 두 가지 현상이 뒤따르는데, 상(想)의 잠재와 식(識)의 머묾입니다(삶의 메커니즘 참조). 상(想)은 행위의 재현을 위한 경향이어서 같은 행위의 반복을 이끄는 방법으로 삶의 질(質)을 결정하는 요소입니다. 식(識)은 인식 과정에서 생겨나고 행위를 거치면 인식과 행위의 과정에 대한 앎을 몸통으로 행위의 질에 따라 욕계(慾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어디에 머뭅니다. 그리고 머문 식(識)은 이전의 삶의 과정에서 머물러 쌓여 있는 식(識)의 무더기[식온(識蘊)]에 더해져서 식온(識蘊)을 늘어나게 하는데, 연기(緣起)된 식(識)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식(識)이 머물고 늘어나면 명색(名色)이 참여하여 새로운 존재를 형성합니다[유(有)]. 이런 방식으로 업(業)은 상(想)을 잠재시켜 행위를 반복하게 하고, 식(識)을 머물게 하여 존재 즉 자기 상태의 변화를 이끕니다.
업에 대한 이런 이해 위에서 중생은 이렇게 정의됩니다. ― 「kammassakā sattā kammadāyādā kammayonī kammabandhū kammapaṭisaraṇā 중생들은 자신의 업(業)이고, 업을 잇고, 업이 근원이고, 업을 다루고, 업의 도움을 받는다.」(MN 135-업 분석의 짧은 경)/(AN 5.57-반복 숙고해야 하는 경우 경)/(AN 10.216-기어감의 경)
마찬가지로 중생에 속한 나 역시 같은 방법으로 정의됩니다. ― 「kammassakomhi kammadāyādo kammayoni kammabandhu kammapaṭisaraṇo 나는 자신의 업(業)이고, 업을 잇고, 업이 근원이고, 업을 다루고, 업의 도움을 받는다.」(AN 5.57-반복 숙고해야 하는 경우 경)/(AN 10.48-출가자에 의한 반복 경)
그리고 중생에 속한 다른 사람 역시 같은 방법으로 정의됩니다. ― 「kammassako ayamāyasmā kammadāyādo kammayoni kammabandhu kammappaṭisaraṇo 이 존자는 자신의 업(業)이고, 업을 잇고, 업이 근원이고, 업을 다루고, 업의 도움을 받는다.」(AN 5.161-노여움의 제거 경1)
이때, 주제에 따라 (MN 135-업 분석의 짧은 경)은 ‘업이 중생들을 저열함과 뛰어남으로 구분한다.’라고 이어지고, 다른 경들은 모두 ‘(나는-남은-중생은) 선(善)하거나 악(惡)한 업을 짓고 그것을 잇는다.’라고 이어집니다.
이렇게 나는 나의 업을 잇는 존재입니다. 어떤 업들을 짓고 그 업들을 이어서 지금 이런 존재 상태를 만들고, 이런 내가 지금 다시 업을 짓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지난 삶의 누적 위에 지금 삶의 결과를 쌓으며 변해가는 것이 바로 지금의 나입니다.
2. 업장(業障) ― 업(業)에 따르는 장애
업은 이렇게 안으로는 자신의 존재 상태를 만들지만, 밖으로는 다른 존재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나의 업의 영향을 받은 다른 존재들은 자기의 입장에서 나에게 반응하는데, 관계의 형성입니다. 그래서 어떤 업은 안으로는 나의 존재를 나쁜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밖으로는 다른 존재들의 나쁜 반응을 유도합니다. 그러나 어떤 업은 안으로는 나의 존재를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밖으로는 다른 존재들의 좋은 반응을 유도합니다. 이때, 앞의 경우는 삿된 업이고, 뒤의 경우는 바른 업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른 업은 공덕(功德)을 만들어서 행복을 가져오고, 삿된 업은 죄악을 만들어서 괴로움을 가져오는데, 삶의 과정에서 삿된 업 때문에 괴로움이 찾아오는 것을 업의 장애 즉 업장(業障)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업장은 안으로 자신의 나쁜 존재 상태와 밖으로 다른 존재들의 나쁜 반응이 나의 삶에 미치는 나쁜 영향력이라고 해야 합니다.
한편, 경들은 업(業)의 보(報)에 의한 태어남을 말하는데, 업이 안으로 자신의 존재 상태를 만들고 그것을 잇는 측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업(業)의 보(報)에 의해 태어나 다른 존재들의 반응에 따른 영향으로의 업보(業報)를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생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업(業) : 자신의 존재 상태의 변화 → 보(報)① 태어남,
다른 존재들의 반응 → 보(報)② 업보(業報)
3. 업장소멸(業障消滅)
이런 업장은 안으로 자신의 나쁜 존재 상태를 개선하고, 밖으로 다른 존재들의 나쁜 반응이 나의 삶에 미치는 나쁜 영향력을 해소할 때 소멸할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두 가지 성숙을 제시하는데, 사념처(四念處)로 시작하고 사마타-위빳사나로 완성되는 내적인 성숙과 사무량심(四無量心)-사섭법(四攝法)으로 접근하는 관계의 성숙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두 가지 성숙이 불교가 제시하는 업장소멸의 방법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 내적인 성숙 ― 「사념처(四念處) → 사마타-위빳사나」
• 관계의 성숙 ― 「자(慈)-비(悲)-희(喜)-사(捨) 사무량심(四無量心) → 보시(布施)-애어(愛語)-이행(利行)-동사(同事) 사섭법(四攝法)」
이것이 지금 짓는 업의 영향력과 과거에 지은 업의 영향력의 해소 즉 업장소멸 (業障消滅)에 대한 불교적인 이해입니다.
[2] 업(業)과 과(果)와 보(報)
업장(業障)을 삶의 과정에서 삿된 업 때문에 괴로움이 찾아오는 것 또는 업의 결과가 나의 삶에 미치는 나쁜 영향력이라고 설명하였는데, 이런 설명에는 업(業-kamma)과 과(果-phala) 그리고 보(報-vipāka)라는 3개의 연결된 개념이 동원됩니다. 이때, 업(業)은 행위 자체 또는 식(識)과 상(想)의 형태로 남아서 작용하는 행위의 영향력이고, 과(果)는 고(苦)-락(樂)의 형태로 생겨난 행위의 결과 즉 나의 존재 상태 또는 다른 존재들의 반응이며, 보(報)는 과(果)를 삶의 과정에서 고(苦)-락(樂)의 형태로 직접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어떤 몸으로 가서 태어날 것인지도 보(報)를 설명하는 중요한 관점입니다. 아마도 자기 존재 상태의 변화 측면에서 보(報)는 태어남을 이끌고, 다른 존재들의 반응 측면에서 보(報)는 태어나 살아가는 동안에 미치는 영향으로의 업보(業報)라고 할 것입니다.
업(業)과 과(果)와 보(報)는 불교를 포괄하는 주제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 설명하기에는 적절치 않아서 중요한 개념 몇 가지만 소개하고 업장소멸(業障消滅)의 구체적 주제로 연결하겠습니다.
1. 과(果-phala)와 보(報-vipāka)는 다른 것 ― (DN 17.12-마하수닷사나 경, 선(禪)의 증득)
“atha kho, ānanda, rañño mahāsudassanassa etadahosi — ‘kissa nu kho me idaṃ kammassa phalaṃ kissa kammassa vipāko, yenāhaṃ etarahi evaṃmahiddhiko evaṃmahānubhāvo’ti? 그때, 아난다여, 마하수닷사나 왕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 ‘나에게 어떤 업(業)의 과(果-결실)와 어떤 업의 보(報-구체적 경험)가 있어서 그것 때문에 지금 이런 큰 신통과 이런 큰 위엄이 있는 것일까?’라고.
2. 업(業)의 꿰뚫음 ― (AN 6.63-꿰뚫음 경)
• cetanāhaṃ, bhikkhave, kammaṃ vadāmi. cetayitvā kammaṃ karoti — kāyena vācāya manasā. 비구들이여, 의도(意圖)가 업(業)이라고 나는 말한다. 의도한 뒤에[의도하면서] 몸에 의해, 말에 의해, 의(意)에 의해 업(業)을 짓는다.
• “katamā ca, bhikkhave, kammānaṃ vemattatā? atthi, bhikkhave, kammaṃ niraya -vedanīyaṃ, atthi kammaṃ tiracchānayonivedanīyaṃ, atthi kammaṃ pettivisayavedanīyaṃ, atthi kammaṃ manussalokavedanīyaṃ, atthi kammaṃ devalokavedanīyaṃ. ayaṃ vuccati, bhikkhave, kammānaṃ vemattatā. 비구들이여, 무엇이 업들의 차별인가? 비구들이여, 지옥이 경험될 업이 있고. 축생의 모태가 경험될 업이 있고, 아귀의 영역이 경험될 업이 있고, 인간 세상이 경험될 업이 있고, 하늘 세상이 경험될 업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업들의 차별이라고 불린다.
• “katamo ca, bhikkhave, kammānaṃ vipāko? tividhāhaṃ, bhikkhave, kammānaṃ vipākaṃ vadāmi — diṭṭheva dhamme, upapajje vā, apare vā pariyāye. ayaṃ vuccati, bhikkhave, kammānaṃ vipāko. 비구들이여, 무엇이 업들의 보(報)인가? 비구들이여, 지금여기[금생(今生)]거나 걸어서 닿는 곳[내생(來生)]이거나 그 후에 오는 생(生)의 세 겹의 업들의 보(報)를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업들의 보(報)라고 불린다.
3. 의도에 속한 업(業) = 유위(有爲)의 업(業) ― (AN 10.217-의도에 속함 경1)/(AN 10.218-의도에 속함 경1)/(AN 10.219-업(業)에서 생긴 몸 경)
“nāhaṃ, bhikkhave, sañcetanikānaṃ kammānaṃ katānaṃ upacitānaṃ appaṭisaṃ -veditvā byantībhāvaṃ vadāmi. tañca kho diṭṭheva dhamme upapajje vā apare vā pariyāye. na tvevāhaṃ, bhikkhave, sañcetanikānaṃ kammānaṃ katānaṃ upacitānaṃ appaṭisaṃveditvā dukkhassantakiriyaṃ vadāmi. 비구들이여, 의도에 속한 업(業)들을 짓고 쌓을 때, 경험하지 않음에 의한 소멸을 나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여기[금생(今生)]거나 걸어서 닿는 곳[내생(來生)]이거나 그 후에 오는 생(生)에서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나는 의도에 속한 업(業)들을 짓고 쌓을 때, 경험하지 않음에 의한 괴로움의 끝을 말하지 않는다.
4. 업(業)이 익는 곳에서 보(報)를 경험 ― (AN 3.34-인연 경)
“yaṃ, bhikkhave, lobhapakataṃ kammaṃ lobhajaṃ lobhanidānaṃ lobhasamudayaṃ, yatthassa attabhāvo nibbattati tattha taṃ kammaṃ vipaccati. yattha taṃ kammaṃ vipaccati tattha tassa kammassa vipākaṃ paṭisaṃvedeti, diṭṭhe vā dhamme upapajja vā apare vā pariyāye. 비구들이여, 망(望)으로 지었고 망(望)에서 생겼고 망(望)이 인연이고 망(望)에서 자라난 업(業)은 자기 존재가 생겨나는 곳에서 익는다. 그 업이 익는 곳에서 그 업의 보(報)를 경험한다. 지금여기[금생(今生)]거나 걸어서 닿는 곳[내생(來生)]이거나 그 후에 오는 생(生)에서. … 진(嗔)과 치(癡)에 반복 …
※ 망(望) ― 한역(漢譯)에서는 lobha-dosa-moha와 rāga-dosa-moha를 모두 탐(貪)-진(嗔)-치(癡)로 번역하고 있지만, lobha와 rāga는 다른 것입니다. 근본경전연구회는 두 용어의 의미를 구명하고, 서로 다름을 고려하여 rāga는 탐(貪)으로, lobha는 망(望)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5. 업(業)의 보(報)에 의해서 태어남
1) 이런 업(業)의 보(報)에 의해 여기에서 죽어서 거기에 태어났다 ― (AN 8.64-가야시사 경)
“so kho ahaṃ, bhikkhave, aparena samayena appamatto ātāpī pahitatto viharanto obhāsañceva sañjānāmi, rūpāni ca passāmi, tāhi ca devatāhi saddhiṃ santiṭṭhāmi sallapāmi sākacchaṃ samāpajjāmi, tā ca devatā jānāmi — ‘imā devatā amukamhā vā amukamhā vā devanikāyā’ti, tā ca devatā jānāmi — ‘imā devatā imassa kammassa vipākena ito cutā tattha upapannā’ti, tā ca devatā jānāmi — ‘imā devatā evamāhārā evaṃsukhadukkhappaṭisaṃvediniyo’ti, tā ca devatā jānāmi — ‘imā devatā evaṃdīghāyukā evaṃciraṭṭhitikā’ti, tā ca devatā jānāmi yadi vā me devatāhi saddhiṃ sannivutthapubbaṃ yadi vā na sannivutthapubbanti. 비구들이여, 나중에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문 나는 ①빛을 상(想)하고, ②색(色)들을 보고, ③그 신들과 함께 지내고, 대화하고, 토론하고, ④그 신들을 ‘이 신들은 이런저런 신들의 무리에 속한다.’라고 알고, ⑤그 신들을 ‘이 신들은 이런 업(業)의 보(報)에 의해 여기에서 죽어서 거기에 태어났다.’라고 알고, ⑥그 신들을 ‘이 신들은 이런 업(業)의 보(報)에 의해 이런 음식을 먹고, 이런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라고 알고, ⑦그 신들을 ‘이 신들은 이런 긴 수명을 가지고, 이렇게 오래 머문다.’라고 알고, ⑧그 신들을 ‘내가 이 신들과 예전에 함께 살았었는지, 예전에 함께 살지 않았었는지’라고 알았다.
2) 업(業)의 보(報) 때문에 지옥에서 겪음 ― (SN 19.1-해골 경)
eso, bhikkhave, satto imasmiṃyeva rājagahe goghātako ahosi. so tassa kammassa vipākena bahūni vassāni bahūni vassasatāni bahūni vassasahassāni bahūni vassasatasahassāni niraye paccitvā tasseva kammassa vipākāvasesena evarūpaṃ attabhāvappaṭilābhaṃ paṭisaṃvedeti.
비구들이여, 이 중생은 라자가하에서 소 잡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 업의 보 때문에 수년, 수백 년, 수천 년, 수십만 년 동안 지옥에서 겪은 뒤 그 업의 남아 있는 보 때문에 이런 자기 존재를 얻었다.
3) 업(業)과 보(報)의 경우와 경우 아님
앙굿따라 니까야 하나의 모음 (15. aṭṭhānapāḷi-경우 아님의 범위)는 업(業)과 보(報)와 태어남의 관계에서 경우와 경우 아님을 설명합니다. 보(報)의 측면에서 업(業)의 선(善)-악(惡)이 규정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런 규정에 의해 업(業)-과(果)-보(報)의 법칙성이 성립한다고 하겠습니다.

6. 업(業)-과(果)-보(報)의 법칙성
― 과(果)도 보(報)도 고(苦)인 업(業)과 과(果)도 보(報)도 락(樂)인 업(業)
1) 과(果)도 보(報)도 고(苦)인 업(業) = 불선업(不善業)-악업(惡業)
• 십사도(十邪道) : (AN 10.143-괴로움을 낳음 경)/(AN 10.144-괴로움의 보(報) 경) ― 삿된 견해-삿된 사유-삿된 말-삿된 행위-삿된 생활-삿된 노력-삿된 사띠-삿된 삼매-삿된 앎-삿된 해탈
• 십악업(十惡業) : (AN 10.187-괴로움을 낳음 경)/(AN 10.188-괴로움의 보(報) 경) ― 살생(殺生)-투도(偸盜)-사음(邪淫)-망어(妄語)-양설(兩舌)-악구(惡口)-기어(綺語)-간탐(慳貪)-진에(瞋恚)-사견(邪見)
• (AN 2.191-200-불선(不善)의 반복) ― ①화(kodha)-원한(upanāha), ②저주(makkha)-횡포(paḷāsa), ③질투(issā)-인색(macchariya), ④사기(māyā)-교활(sāṭheyya), ⑤자책(自責)의 두려움 없음(ahirika)-타책(他責)의 두려움 없음(anottappa)
2) 과(果)도 보(報)도 락(樂)인 업(業) = 선업(善業)
• 십정도(十正道) : (AN 10.143-괴로움을 낳음 경)/(AN 10.144-괴로움의 보(報) 경) ― 바른 견해-바른 사유-바른 말-바른 행위-바른 생활-바른 노력-바른 사띠-바른 삼매-바른 앎-바른 해탈
• 십선업(十善業) : (AN 10.187-괴로움을 낳음 경)/(AN 10.188-괴로움의 보(報) 경) ― 불살생(不殺生)-불투도(不偸盜)-불사음(不邪淫)-불망어(不妄語)-불양설(不兩舌)-불악구(不惡口)-불기어(不綺語)-불간탐(不慳貪)-부진에(不瞋恚)-정견(正見)
• (AN 2.191-200-불선(不善)의 반복) ― ①화 없음(akodha)-원한 없음(anupanāha) , ②저주 없음(amakkha)-횡포 없음(apaḷāsa), ③질투 없음(anissā)-인색 없음 (amacchariya), ④사기 없음(amāyā)-교활 없음(asāṭheyya), ⑤자책(自責)의 두려움(hiri)-타책(他責)의 두려움(ottappa)
[3] 업장(業障)의 경전 용례 ― (AN 6.86-장애 경)
업장(業障)이라고 직접 번역할 수 있는 용어로는 kammāvaraṇatā가 있는데, 한 개의 경에서 발견됩니다. 보통 장애의 의미로는 āvaraṇa(덮개-장애)와 nīvaraṇa(장애)의 두 단어가 함께 쓰이는데, 대표적으로 다섯 가지 장애[오장(五障)] 또는 다섯 가지 덮개[오개(五蓋)] 등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업과 연결해서는 kammanīvaraṇa의 형태로는 나타나지 않고, āvaraṇa의 추상명사 형태인 āvaraṇatā(방해함. 억제함)로만 (AN 6.86-장애 경)에 유일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업장(業障)의 원어는 kammāvaraṇatā라고 해야 합니다.
“chahi, bhikkhave, dhammehi samannāgato suṇantopi saddhammaṃ abhabbo niyāmaṃ okkamituṃ kusalesu dhammesu sammattaṃ. katamehi chahi? kammāvaraṇatāya samannāgato hoti, kilesāvaraṇatāya samannāgato hoti, vipākāvaraṇatāya samannāgato hoti, assaddho ca hoti, acchandiko ca, duppañño ca. imehi kho, bhikkhave, chahi dhammehi samannāgato suṇantopi saddhammaṃ abhabbo niyāmaṃ okkamituṃ kusalesu dhammesu sammattaṃ.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법을 갖춘 사람은 정법을 배운다고 해도 확실함과 선법에 대한 바름에 들어갈 수 없다. 어떤 여섯 가지인가? 업(業)의 장애[업장(業障)]를 갖추고, 오염의 장애를 갖추고, 보(報)의 장애를 갖추고, 믿음이 없고, 관심이 없고, 어리석다. 비구들이여, 이런 여섯 가지 법을 갖춘 사람은 정법을 배운다고 해도 확실함과 선법에 대한 바름에 들어갈 수 없다.
“chahi, bhikkhave, dhammehi samannāgato suṇanto saddhammaṃ bhabbo niyāmaṃ okkamituṃ kusalesu dhammesu sammattaṃ. katamehi chahi? na kammāvaraṇatāya samannāgato hoti, na kilesāvaraṇatāya samannāgato hoti, na vipākāvaraṇatāya samannāgato hoti, saddho ca hoti, chandiko ca, paññavā ca. imehi kho, bhikkhave, chahi dhammehi samannāgato suṇanto saddhammaṃ bhabbo niyāmaṃ okkamituṃ kusalesu dhammesu sammattan”ti.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법을 갖추고 정법을 배우는 사람은 확실함과 선법에 대한 바름에 들어갈 수 있다. 어떤 여섯 가지인가? 업(業)의 장애[업장(業障)]를 갖추지 않고, 오염의 장애를 갖추지 않고, 보(報)의 장애를 갖추지 않고, 믿음이 있고, 관심이 있고, 지혜롭다. 비구들이여, 이런 여섯 가지 법을 갖추고 정법을 배우는 사람은 확실함과 선법에 대한 바름에 들어갈 수 있다.
이 경은 업과 오염과 보에 의한 세 가지 장애를 말하는데, ①식(識)의 머묾에 의해 업(業)을 잇는 중생으로의 업의 장애, ②상(想)의 잠재에 의한 삶의 질의 관점에서의 오염의 장애 그리고 ③다른 존재들의 반응으로의 보(報)의 장애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오염은 이 경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에 그 의미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타당합니다.
넓은 의미로 업장(業障)은 업(業)에 따르는 안팎의 문제 상황이고, 나쁜 업에 따르는 나쁜 업보(業報-kammavipāka)라고 해야 하는데, 이 경에서는 안의 문제 상황을 업(業)의 장애와 오염의 장애로, 밖의 문제 상황을 보(報)의 장애로 세분하여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삼장(三障)의 번뇌장(煩惱障), 업장(業障), 보장(報障)을 이런 해석 위에서 대비하면, 「번뇌장=오염의 장애 → 상(想), 업장(業障)=업(業)의 장애 → 식(識), 보장(報障)=보(報)의 장애 → 다른 존재들의 반응」으로 타당하게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업장(業障)은 넓은 의미로는 업(業)과 관련된 장애여서 업(業)-오염-보(報)의 세 가지 장애 모두를 포괄하고, 좁은 의미로는 ①식(識)의 머묾에 의해 업(業)을 잇는 과정에서의 존재 상태의 퇴보와 나쁜 태어남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업장에 대한 이런 이해 없이 보(報)의 장애를 업장(業障)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하겠는데, 넓은 의미의 업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효과적인 업장소멸(業障消滅)을 위해서는 그 의미를 명확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4] 업장(業障) 즉 과거의 영향력의 비중 ― (SN 36.21-시와까 경)
삶은 현재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연속이어서 미래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지난 삶의 영향 위에 현재의 조건들이 더해져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때, 과거와 현재는 어떤 비중으로 함께하여 미래를 만듭니까?
(SN 36.21-시와까 경)에서 몰리야시와까 유행승은 ‘어떤 것이든 사람이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다.’라는 어떤 사문-바라문의 주장에 대해 부처님께 질문하고, 부처님은 세상에서 사실로 인정되고 있는 현상들로써 답합니다.
부처님의 답변에 의하면,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담즙, 점액, 바람, 세 가지의 겹침, 기후의 변화, 고르지 못한 주의집중, 갑작스러움, 그리고 업보의 여덟 가지 조건들의 결합을 통해 생겨납니다. 몸에 속한 네 가지에 환경과 마음과 의외의 변수 등이 더해진 현재 상황이 일곱 가지이고, 과거의 영향력인 업보(業報)가 더해진 여덟 가지입니다.
숫자로 판단할 내용은 아니겠지만, 현재의 영향력 일곱 가지와 과거의 영향력 한 가지로 구성되어 7:1의 비중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만드는 책임은 과거보다는 현재에 있습니다. 그러니 괴롭지 않고 행복 하고자 하면, 과거의 영향력에 매이지 말고 현재의 선한 영향력을 키워야 하고, 그때 더 향상된 미래도 만들어집니다. ― 「불교는 현재진행형!」
한편, 과거의 영향력은 다른 관점에서 이해할 수도 있는데, 업(業)의 보(報)에 의한 태어남의 측면입니다. 전생에 어떤 업을 지었는지에 따라 몸이 무너진 뒤 어떤 몸으로 가는지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나에게 인간의 몸에 속한 네 가지와 인간의 삶에 미치는 환경 그리고 인간 세상에서 부딪히는 갑작스러움이라는 여섯 가지 조건이 작용하는데, 내가 전생의 업에 의해 인간의 몸으로 왔기 때문에 만나는 조건이라고 해야 합니다. 만약, 전생에 공덕을 많이 쌓아서 하늘 세상에 신의 몸으로 태어났다면, 신의 몸이 가지는 특성과 신의 세상의 환경과 그 세상에서의 갑작스러움을 변수로 지금 나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전생에 죄악을 많이 쌓아서 지옥이나 짐승 세상에 태어났다면 지옥 중생이나 짐승의 몸이 가지는 특성과 그 환경 그리고 그 갑작스러움을 변수로 지금 나의 삶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 생에 하늘에 태어나 하늘 사람의 조건 가운데 살고자 한다면, 금생에 하늘로 이끄는 업을 지어야 합니다. 그때, 하늘에 태어나는 것이 바로 업(業)의 보(報)이고, 하늘 사람의 삶 가운데 다시 이전의 업들의 보(報)를 경험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업장은 두 가지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한 가지는, 여덟 가지 조건 가운데 업보(業報) 한 가지여서 과거보다 현재가 더 힘 있다고 보는 관점인데, 이 경우에 불교는 몸의 건강과 세상과의 관계[환경-갑작스러움] 그리고 마음의 제어[고른 주의집중]라는 현재의 제어를 통해 과거인 업보(業報)를 극복하고 삶을 향상으로 이끕니다. 다른 경우는, 인간 세상에 이런 몸으로 태어난 삶 즉 과거 때문에 생긴 한계 때문에 현재보다 과거가 더 힘 있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이 경우에도 불교는 마음의 제어[고른 주의집중]라는 현재의 제어에 집중함으로써 과거를 극복하고 향상된 미래를 만들도록 이끄는데, 내적인 성숙과 관계의 성숙으로 구성된 두 가지 성숙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비록 과거의 영향력이 주는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지금 나의 삶을 중심으로 과거의 영향력을 해소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MN 131-상서로운 하룻밤 경) 등은 「과거를 이어 머물지 말고, 미래를 동경하지 말라. 과거는 버려졌고, 미래는 얻지 못했다. 현재의 법을 거기서 거듭 통찰하라. 현명한 자는 끌려가지 않고 안정됨 위에서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라고 말하는데, 과거와 미래가 아닌, 오직 지금이 있을 뿐이니 끌려가지 말고 지금여기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이런 관점은 (AN 3.101-소금 종지 경)으로 연결되는데, 불교적인 업장소멸 (業障消滅)의 전형을 잘 보여줍니다.
[5] 업장소멸(業障消滅) ― (AN 3.101-소금 종지 경)
이렇게 업장소멸에 대한 불교의 근본 입장은 과거 업의 영향력을 현재 삶의 극대화를 통해 극복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는 업(業)과 과(果)와 보(報)의 관계 위에서 (SN 36.21-시와까 경)이 알려주는 과거와 현재의 비중이 바탕이 된다고 하겠는데, 이런 입장을 극명하게 알려주는 경으로 (AN 3.101-소금 종지 경)을 말할 수 있습니다.
(AN 3.101-소금 종지 경)은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 ‘이 사람이 업을 거듭 지은 만큼 거듭 그것을 경험한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런 존재에게는 범행(梵行)의 삶이 없고, 바르게 괴로움을 끝내기 위한 기회가 알려지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다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 ‘이 사람이 경험되어야 하는 업을 거듭 지은 만큼 거듭 보(報)를 경험한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런 존재에게는 범행(梵行)의 삶이 있고, 바르게 괴로움을 끝내기 위한 기회가 알려진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여기, 비구들이여, 사소하게 지은 악업도 어떤 사람에게는 곧바로 지옥으로 이끈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여기 그만큼 사소하게 지은 악업이 어떤 사람에게는 지금여기에서 경험될 것이다. 아주 조금도 보이지 않는데 어찌 많겠는가!」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업을 지은 만큼 경험한다.’라는 것은 업(業)에서 생기는 과(果)를 직접 경험한다는 것이고, ‘경험되어야 하는 업을 지은 만큼 보(報)를 경험한다.’라는 것은 업(業)에서 생긴 과(果)가 경험되는 시점의 다른 조건들과 함께 어우러져서 경험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업을 지은 만큼 경험한다.’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어서 이런 사람에게는 범행(梵行)의 삶이 없고, 바르게 괴로움을 끝내기 위한 기회가 알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험되어야 하는 업을 지은 만큼 보(報)를 경험한다.’라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에게는 범행(梵行)의 삶이 있고, 바르게 괴로움을 끝내기 위한 기회가 알려지는 것입니다. 특히, 이런 사실에 입각할 때, 과(果)는 다른 조건들의 영향으로 더 크게 경험될 수도 있고, 더 작게 경험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경험하는 고(苦)와 락(樂)의 크기 변화].
이런 점에서 업(業)의 보(報)와 어우러지는 다른 조건들도 주목되어야 하는데, (SN 36.21-시와까 경)이 알려주는 여덟 가지 중 업보(業報)를 제외한 일곱 가지입니다. 그래서 몸을 잘 관리하는 것과 기후의 변화[=환경]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 고르지 못한 주의집중[=치우침–몰두-중독 → 마음 상태]의 해소, 갑작스러움[=의외의 변수]에 대한 선제적 대비 등을 말할 수 있습니다.
경은 이런 주제에 대해서도 답하는데, 사소하게 지은 악업에 의해서도 곧바로 지옥으로 이끌리는 사람을 설명합니다. 다른 조건들이 방어해 주지 않을 때 사소하게 지은 악업이 이끄는 힘이 태어남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신(身)과 계(戒)와 심(心)과 혜(慧)를 닦지 않아서 하찮고 작은 존재인 어떤 사람은 작은 것에 의해서도 괴롭게 머물고, 사소하게 지은 악업도 곧바로 지옥으로 이끈다.」
또한, 사소하게 지은 악업이 지금여기에서 경험되는 사람도 설명합니다. 다른 조건들이 방어해 줄 때 사소하게 지은 악업은 삶의 과정에서 해소되고, 그에 따라 그 힘이 태어남의 방향을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신(身)과 계(戒)와 심(心)과 혜(慧)를 닦아서 하찮지 않고 큰 존재인 어떤 사람은 무량하게 머물고, 그만큼 사소하게 지은 악업은 지금여기에서 경험되어질 것이다. 아주 조금도 보이지 않는데 어찌 많겠는가!」
이런 점에서 이 경은 업장소멸(業障消滅)의 주제로 이어지는데, ①살면서 짓는 악업이 살아있는 동안 다 경험되어 다음 생으로 넘어갈 것이 없는 측면에서의 업장소멸과 ②과거 업(業)의 결과로 찾아오는 업장(業障)에 대해 힘 있는 다른 조건들의 어우러짐에 의해 괴로움을 겪지 않을 수 있는 측면에서의 업장소멸입니다. 특히, ②의 경우는 지난 삶의 결과로 찾아오는 업보를 무력화시킨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업장소멸의 개념에 맞는 접근인데, 이 경의 중심 주제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신(身)과 계(戒)와 심(心)과 혜(慧)를 닦아서 지금의 자신을 하찮지 않고 큰 존재로 만들어 과거의 영향력을 극복하는 방법입니다.
경은 세 가지 비유를 통해 이렇게 업장을 소멸하는 삶을 설명해 줍니다.
• 비유 1 ―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물이 조금 밖에 없는 그릇에 소금 종지를 넣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적은 물과 그 소금 종지의 소금은 마실 수 없을 것인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그 원인은 무엇인가?” “대덕이시여, 그 물그릇 안에 물은 조금 밖에 없습니다. 그런 소금 종지가 담긴 그 물은 마실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강가 강에 소금 종지를 넣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강가 강과 그 소금 종지의 소금은 마실 수 없을 것인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그 원인은 무엇인가?” “대덕이시여, 그 강가 강에는 많은 물의 무더기가 있습니다. 그런 소금 종지가 담긴 그 물의 무더기는 마실 수 없지 않습니다.”」
•비유 2 ―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동전 반 개로도 구속되고, 동전 한 개로도 구속되고, 동전 백 개로도 구속된다.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동전 반 개로도 구
속되지 않고, 동전 한 개로도 구속되지 않고, 동전 백 개로도 구속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동전 반 개로도 구속되고, 동전 한 개로도 구속되고, 동전 백 개로도 구속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부랑자고 가난하고 재물이 적다. 비구들이여, 이런 사람이 동전 반 개로도 구속되고, 동전 한 개로도 구속되고, 동전 백 개로도 구속된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동전 반 개로도 구속되지 않고, 동전 한 개로도 구속되지 않고, 동전 백 개로도 구속되지 않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호화롭고 큰 부자이고 재물이 많다. 비구들이여, 이런 사람이 동전 반 개로도 구속되지 않고, 동전 한 개로도 구속되지 않고, 동전 백 개로도 구속되지 않는다.
• 비유 3 ―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양고기 장사나 양을 잡는 사람은 양을 훔친 자들 가운데 어떤 자는 죽이거나 묶거나 태우거나 하고 싶은 대로 할 수가 있지만, 양을 훔친 자들 가운데 어떤 자는 죽이거나 묶거나 태우거나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을 양고기 장사나 양을 잡는 사람은 양을 훔친 자들 가운데 죽이거나 묶거나 태우거나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부랑자고 가난하고 재물이 적다. 이런 사람을, 비구들이여, 양고기 장사나 양을 잡는 사람은 양을 훔친 자들 가운데 죽이거나 묶거나 태우거나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을 양고기 장사나 양을 잡는 사람은 양을 훔친 자들 가운데 죽이거나 묶거나 태우거나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호화롭고 큰 부자이고 재물이 많은 왕이거나 왕의 으뜸 신하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사람을 양고기 장사나 양을 잡는 사람은 양을 훔친 자들 가운데 죽이거나 묶거나 태우거나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 오히려 손을 맞잡고 그 사람에게 요청한다. ― ‘존자여, 저에게 양이나 양의 값을 주십시오.’라고. 이처럼, 비구들이여, 그러한 사소하게 지은 악업도 여기 어떤 사람에게는 곧바로 지옥으로 이끈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그러한 사소하게 지은 악업이 여기 어떤 사람에게는 지금여기에서 경험되어질 것이다. 아주 조금도 보이지 않는데 어찌 많겠는가!」
비유 1은 많은 것으로 적은 것을 희석하는 방법인데, 과거 업의 영향력을 현재 삶의 극대화를 통해 극복하는 불교적 업장소멸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비유 2와 비유 3은 준비되지 않은 사람과 준비된 사람의 차이를 말해주는데, 법다움 즉 정당한 방법에 최선의 노력을 얹어서 준비한 사람은 어떤 경우에 처했을 때 그 영향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자칫 ‘무전유죄(無錢有罪) 유전무죄(有錢無罪)’의 현상을 연상할 수도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실제적 현상을 통해 준비된 사람이 되어야 하는 필요성을 안내하는 비유입니다.
이때, 경은 준비된 사람의 덕목으로 신(身)과 계(戒)와 심(心)과 혜(慧)를 닦을 것을 말하는데, 계(戒)와 심(心)과 혜(慧)를 닦는 것은 계(戒)-심(心)-혜(慧) 삼학(三學)이어서 계(戒)-정(定)-혜(慧) 삼온(三蘊)을 닦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身)을 닦는 것과 삼학(三學)은 몸과 마음을 닦는 것이고, 이것이 두 가지 성숙이며, 보시(布施)-계(戒)-수행(修行)의 세 가지 공덕행(功德行)으로 포괄됩니다.
그래서 과거 업의 영향력을 현재 삶의 극대화를 통해 극복하기 위해 준비하는 삶은 보시(布施)-계(戒)-수행(修行)의 세 가지 공덕행(功德行)을 실천하여 몸과 마음을 닦고, 내적인 성숙과 관계의 성숙을 이루는 것입니다. ― 「보시(布施)하고 오계(五戒)를 지니고 공부[교학+수행]하는 사람의 삶은 무량(無量)해서 업보(業報)에 의해 찾아오는 업장(業障)이 나를 힘들게 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업장소멸(業障消滅)입니다!」
[6] 완전한 업장소멸
앞에서 본 (AN 10.217-의도에 속함 경1) 등의 설명에 의하면, ‘의도에 속한 업(業)들을 짓고 쌓을 때’ 즉 번뇌의 영향을 받는 유위(有爲)적 삶의 과정에서는, 업(業)의 결과로 생긴 과(果)는 경험하지 않는 한 해소되지 않습니다. 즉 보(報)를 경험해야만 해소되는 것이기 때문에, 지난 업(業)의 장애 즉 업장(業障)을 어떻게 최소한의 강도로 줄여서 겪을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되는데, 이것이 (AN 3.101-소금 종지 경)이 알려주는 업장소멸(業障消滅)의 의미이고,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업장소멸(業障消滅)을 위한 불교적 방법입니다.
한편,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문제들이 ‘의도에 속한 업(業)들을 짓고 쌓을 때’의 문제 즉 번뇌의 영향을 받는 유위(有爲)의 삶의 과정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뇌의 크기를 줄여가는 만큼 업장(業障)의 영향력은 줄어들고, 번뇌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해탈하면[아라한(阿羅漢)] 과거의 업(業)은 더 이상 장애로 작용하지 못하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이 완전한 업장소멸(業障消滅)이고, 그 과정이 불교 신자에게는 신행(信行)이고, 수행(修行)입니다.
[참고] (SN 35.129-업(業)의 소멸 경) ⇒ https://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4_011&wr_id=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