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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회 작성일 26-02-18 07:13

본문

Ⅱ. 불교(佛敎)는 무엇입니까?


불교는 사는 이야기입니다. 몸과 마음이 함께한 내가 세상을 만나는 이야기이고, 매 순간의 이야기를 누적하며 변화하는 삶을 이끄는 기술입니다.


세상에 있는 다채로운 것들은 그저 사실로서 머물 뿐인데, 사람들은 소유의 사유[욕(慾-kāma)]로 묶고서 그것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그래서 불교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 알고 실천하는 현명한 사람들은 세상의 다채로운 것들에 대해 관심[욕(欲-chanda)]을 제어합니다.(AN 6.63-꿰뚫음 경)


― 「사람의 소유의 사유는 탐(貪)이 함께한 사유이다. 세상에 있는 다채로운 것들은 소유의 사유들이 아니다. 사람의 소유의 사유는 탐(貪)이 함께한 사유이다. 세상에 있는 다채로운 것들은 단지 사실로서 머물 뿐이고, 여기서 현명한 사람들은 관심(chanda)를 제어한다.」


소유(慾-kāma)의 영역[욕계(慾界)]과 존재(有-bhava)의 영역[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으로 구성되는 세상은 걸어가서 그 끝에 닿을 수는 없지만, 세상의 끝에 닿지 않고서 괴로움의 끝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SN 35.99-세상의 끝을 걸어감 경)


사람은 소유의 영역에 속합니다. 소유의 영역 즉 욕계(慾界)는 지옥(地獄)-축생(畜生)-아귀(餓鬼)-인간(人間)-천상(天上)으로 구성되는데,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그 가운데 천상(天上) 즉 하늘 세상의 아래쪽에 위치합니다. 그리고 존재(bhava)의 영역은 소유하고자 함(kāmabhoga)에 따르는 삶의 문제가 해소된 더 높은 하늘 세상입니다. 즉 천상(天上)은 욕계에 속한 하늘과 존재의 영역으로 구성됩니다. 이때, 소유의 영역에서 소유하고자 함(kāmabhoga)을 동력으로 살아가는 자를 소유하고자 하는 자(kāmabhogī-까-마보-기-)라고 합니다.


불교는 이런 세상에서의 삶을 이끄는 기술입니다. 인간이라는 내 삶의 현실 위에서 ①소유하고자 하는 자로서의 행복, ②소유의 영역에서 벗어남, ③존재의 영역에서 벗어남을 위한 세 단계로 이루어진 삶의 기술입니다.


이때, 소유의 영역과 존재의 영역에서 살아가는 존재를 중생(衆生-satta)이라고 하는데, satta는 ‘매달린-붙어있는-의존하는’의 의미를 가집니다. 세상에 매달린-붙어있는-의존하는 나라는 존재를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한편, 마음은 중생으로의 삶에서는 몸을 떠나지 못하는데[몸과 마음의 서로 조건 됨], 그렇다면 중생(衆生-satta)이란 말은 근본적으로는 ‘마음이 몸에 매달린-붙어있는-의존하는 상태’를 지시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몸과 마음은 생존 기간의 불균형이라는 근원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몸이 생존 기간이 지나 무너지면 마음은 새로운 몸에 매달리고-붙어있고-의존하는 상태로 변화하는데, 죽고 다시 태어나는 현상입니다. 특히, 마음을 몸에 매달리고-붙어있고-의존하게 하는 것은 무명(無明)과 애(愛)[갈애]인데, 무명(無明)과 애(愛)가 버려지지 않은 자는 몸이 무너진 뒤에 몸으로 가고, 버려진 자는 몸이 무너진 뒤에 몸으로 가지 않습니다. 몸으로 간 자는 태어남과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몸으로 가지 않은 자는 태어남과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에서 벗어나고, 괴로움에서 벗어납니다.(SN 12.19-우현 경)


이렇게 죽은 뒤에 다시 몸으로 가서 태어나고,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을 겪는 중생으로의 삶의 과정을 윤회(輪迴-saṃsāra/vivaṭṭa)라고 하는데,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교신행(佛敎信行)의 완성입니다. 부처님은 ‘세상에서 윤회의 장막을 벗긴 자(loke vivaṭṭacchada)’라고 불리는데, 이런 의미를 잘 나타내줍니다.(DN 30-삼십이상경) 


한편, 무명(無明)과 애(愛)의 해소를 통해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을 범행(梵行-brahmacariya)이라고 하고, 이런 노력으로 사는 자를 범행을 실천하는 자(brahmacārī-브라흐마짜-리-)라고 합니다.



▣ 자력종교(自力宗敎)인 불교(佛敎) → 「자주(自洲)-법주(法洲)」


불교는 사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삶을 사실 그대로 보아냄으로써 사실 위에 존재하는 삶의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 사는 이야기의 본질입니다. 삶을 사실과 다르게 잘못 보면 사실 위에 존재하는 삶의 문제를 해소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사실 그대로를 보고, 인정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럴 때 무명(無明)과 애(愛)의 해소라는 큰 길이 알려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 위에서 무명(無明)과 애(愛)의 해소를 통해 윤회에서 벗어나는 과정으로의 범행(梵行-brahmacariya)자신의 노력만큼 성과를 냅니다. 몇 개의 경은 「스스로 섬이 되어 머물고, 법을 섬으로 하여 머물러야 한다.」라고 말하는데, 고해(苦海) 즉 괴로움의 바다에 빠진 자에게 안전하게 발 딛고 설 땅으로의 섬입니다. 부처님에 의하면, 세상에는, 누가 되었든, 나의 삶을 바다에서 꺼내 섬으로 옮겨주는 권능 가진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나의 힘으로 바다를 벗어나 섬에 닿아야 하는데, ‘스스로 섬이 되어 머문다.’의 의미입니다[자력종교(自力宗敎)]. 그리고 바다를 벗어나 섬에 닿는 방법이 부처님에 의해 제시되는데, 부처님의 가르침 즉 법(法)입니다. 그래서 법이 지시하는 길을 따라야 바다를 벗어나 섬에 닿을 수 있는데, ‘법을 섬으로 하여 머물러야 한다.’의 의미입니다. 


이때, 섬으로 번역한 빠알리 단어는 dīpa(디-빠)인데, 1. a lamp[등(燈)]; 2. an island[섬]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이 단어를 섬으로 해석하여 「자주(自洲)-법주(法洲)」라고 번역하는데, 중국에서는 등(燈)으로 해석하여 「자등명(自燈明)-법등명(法燈明)」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자주(自洲)-법주(法洲)」는 자력종교(自力宗敎)로서의 불교(佛敎)를 설명하는 비중 큰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을 포함하는 경들을 정리하였는데, 몇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자주(自洲)-법주(法洲)」의 가르침


attadīpā viharatha attasaraṇā anaññasaraṇā, dhammadīpā dhammasaraṇā anaññasaraṇā


앗따디-빠- 위하라타 앗따사라나- 아난냐사라나-, 담마디-빠- 담마사라나- 아난냐사라나-


스스로 섬이 되어 머물고, 스스로 의지처가 되어 머물고, 남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하여 머물고, 법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고, 다른 것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말라. 



1. 완전한 형태 - 격과 시제의 변화에 따라 다른 형태로 네 번 반복됨. 


1) 제시 ― 비구들이여, 스스로 섬이 되어 머물고 스스로 의지처가 되어 머물고 남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하여 머물고 법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고 다른 것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말라. 


2) 어떻게? ― 어떻게 비구는 스스로 섬이 되어 머물고 스스로 의지처가 되어 머물고 남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않는가? 법을 섬으로 하여 머물고 법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고 다른 것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않는가? 


• [답] 사념처(四念處) ― 여기 비구는 신(身-몸)에서 신(身)을 이어 보면서 머문다. 알아차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옳음의 유지-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자는 세상에서 간탐과 고뇌를 제거할 것이다. 수(受-느낌/경험)들에서 … 심(心-마음)에서 … 법(法-현상)들에서 법(法)을 이어 보면서 머문다. 알아차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옳음의 유지-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자는 세상에서 간탐과 고뇌를 제거할 것이다.


3) 이렇게 ― 이처럼 비구는 스스로 섬이 되어 머물고 스스로 의지처가 되어 머물고 남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하여 머물고 법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고, 다른 것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않는다. 


4) 이렇게 하면 ― 누구든지 지금이거나 내가 죽은 뒤에라도 스스로 섬이 되어 머물고 스스로 의지처가 되어 머물고 남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하여 머물고 법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고 다른 것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않으면서 공부를 즐기는 비구들이 나에게 최고의 제자가 될 것이다.


2. 자주법주(自洲法洲)를 완전한 형태로 설하는 경전들


1) (DN 16.13-대반열반경, 웰루와가마의 이야기)/(SN 47.9-병 경) ― 웰루와가마는 부처님의 마지막 안거(安居) 자리입니다. 안거 중에 부처님은 큰 병을 앓고 회복합니다.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께서 아무런 분부 없이 반열반(般涅槃) 하지 않을 것이어서 안심했다고 할 때 부처님은 사권(師拳) 없음의 법문을 설합니다. 마지막까지 움켜쥔 최후의 가르침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자주(自洲)-법주(法洲)의 법문을 설합니다. 법에 의지하고 자신의 힘으로 삶을 향상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2) (SN 47.13-쭌다 경) ― 사리뿟따 존자의 죽음에서 흔들리는 아난다 존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설한 경입니다. ― 「아난다여, 참으로 내가 전에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모든 것으로부터 헤어져야 하고 갈라져야 하고 달라져야 한다고 그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아난다여, 그렇게 한들 여기서 무엇을 얻겠는가? 아난다여, 태어났고 누적되었고 유위(有爲)이고 부서지는 법에 대해 참으로 부서지지 말라고 하면 그런 경우는 없다.」


3) (SN 47.14-욱까쩰라 경) ― 사리뿟따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의 죽음에서 부처님의 소회를 말하는 경입니다. ―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심재(心材)를 가지고 서 있는 큰 나무에서 큰 가지가 꺾어진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심재(心材)를 가지고 서 있는 위대한 비구 상가(僧伽)에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완전한 열반에 든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렇게 한들 여기서 무엇을 얻겠는가? 비구들이여, 태어났고 누적되었고 유위(有爲)이고 부서지는 법에 대해 참으로 부서지지 말라고 하면 그런 경우는 없다.」


3. [제시-어떻게-이렇게]에 이어 다른 형태가 나타나는 경 ― (DN 26.1-전륜성왕 경, 스스로 섬이 되고 의지처가 됨)


비구들이여, 영역인 물려받은 세상에서 살아라. 비구들이여, 영역인 물려받은 세상에서 사는 자는 수명이 번성할 것이고, 용모가 번성할 것이고, 행복이 번성할 것이고, 재산이 번성할 것이고, 힘이 번성할 것이다.


• 수명의 영역에서 비구를 위한 것 - 사여의족(四如意足)

• 용모의 영역에서 비구를 위한 것 - 계(戒)를 잘 지님

• 행복의 영역에서 비구를 위한 것 – 사선(四禪)

• 재산의 영역에서 비구를 위한 것 - 사무량심(四無量心)

• 힘의 영역에서 비구를 위한 것 - 심해탈(心解脫)-혜해탈(慧解脫)의 구족


4. 자주법주 이후를 설하는 경전 ― (SN 22.43-스스로 섬이 됨 경)


자주법주하는 자들은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가 무엇으로부터 생기고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지 그 근원을 조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사념처로 자주법주하는 자들에게 그 이후 과정을 제시해 주는데, 오온(五蘊)을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인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것입니다[여실지견(如實知見)].



▣ 종교(宗敎)는 무엇입니까?


; 유물론(唯物論)[단견(斷見)]도 유신론(有神論)[상견(常見)]도 배제하는 ‘연기(緣起)된 식(識)’의 불교(佛敎)


종교(宗敎)라는 말은 1860년 일본이 독일과 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독일어 '렐리기온스위붕(Religionsübung)'을 번역한 말입니다. 영어로는 Religion입니다. 번역어이기 때문에 종교(宗敎)라는 말이 가지는 고유의 의미는 없습니다. 다만, 서양이 동양에 미친 영향의 일환으로 신(神)과의 연결 관계 위에서 설명되는 기독교적 종교관을 중심으로 종교(宗敎)에 대한 보편적 이해의 경향이 생겼다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종교는 신(神)이라는 개념과의 연결 여부로 크게 구분됩니다. 이때, 창조주 신(神)을 전제하여 인간의 삶을 설명하는 많은 종교와 달리 불교는 신(神)에 대해 이중적 입장을 가집니다.


불교에는 신(神)으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가 두 개입니다. 중생의 영역에 속하는 하늘 세상[천상(天上)]의 존재를 지시하는 deva(데-와)와 창조주를 지시하는 issara(잇사라)입니다. 그러나 세상과 존재에 대해 실답게 아는 부처님에 의해 issara의 존재는 부정되고, deva는 삶의 향상을 위한 노력의 결과로 누구든지 태어날 수 있는 하늘 세상의 존재일 뿐이라고 설명됩니다. 그래서 신(神)은 우리 삶의 결정권자로 참여하는 특별한 권능을 가진 자가 아니라,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을 윤회하는 중생의 한 부류입니다.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 즉 issara(잇사라)는 없고, 하늘 세상의 구성원인 deva(데-와)는 윤회하는 중생의 일부일 뿐이어서 신(神)이라고 번역하지만, 신(神)의 유무(有無)를 말하는 그 신(神)은 아닙니다. → 「(문) 불교(佛敎)는 유신론(有神論)인가요? (답) 아니요.


그런데 issara(잇사라)의 신(神)이 없다면 종교는 무엇입니까


경들은 부처님을 이렇게 찬탄합니다. ― 「”참으로 그분 고따마 존자에게는 이런 좋은 명성이 퍼져있습니다. ― ‘이렇게 그분 세존(世尊)께서는 모든 번뇌 떠나신 분 … 존귀하신 분이시다.’라고. 그는 신과 함께하고 마라와 함께하고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과 사문-바라문과 함께하고 신과 사람과 함께하는 존재-생명을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선언합니다(*). 그는 처음도 좋고 중간에도 좋고 끝도 좋은, 의미를 갖추고 표현을 갖춘 법을 설하고, 온전하게 완전하고 청정한 범행(梵行)을 드러냅니다. 참으로 그런 아라한을 뵙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라고.」


불교(佛敎)를 종교(宗敎)라고 말하면, 종교(宗敎)는 세상과 존재-생명에 대한 실(實)다운 앎 즉 삶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앎에 따라 삶을 향상하여 고멸(苦滅) 즉 완전한 행복을 실현하도록 이끄는 가르침입니다. 깨달아 이 가르침을 설하는 자는 교주(敎主)이고 스승이며, 이 가르침을 뒤따라 자기의 삶을 향상하는 자는 신자(信者)이고 제자입니다. 만약, 무신(無神)이어서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것은 사실 아닌 기준 위에서 세상과 존재-생명을 거짓으로 꾸며내는 그들만의 유희일 뿐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것은 삶을 향상하여 고멸(苦滅)의 실현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불교(佛敎)는 이런 것이고, 종교(宗敎)는 이렇게 정의됩니다. 그리고 이런 정의가 창조주 신앙의 종교적 편협을 극복한 보편적 정의라고 하겠습니다.


(*) 이 문장은 부처님이 자신의 깨달음을 선언할 때는 다른 형태로 나타납니다. ― 「비구들이여, 이런 다섯 가지 집착된 무더기[오취온(五取蘊)]가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색취온(色取蘊), 수취온(受取蘊), 상취온(想取蘊), 행취온(行取蘊), 식취온(識取蘊)이다. 비구들이여, 내가 이 오취온(五取蘊)의 네 가지 계열을 있는 그대로 실답게 알지 못한 때까지 나는 신과 마라와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에서, 사문-바라문과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를 위해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깨달았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나는 이러한 오취온(五取蘊)의 네 가지 계열을 있는 그대로 실답게 알았기 때문에 신과 마라와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에서, 사문-바라문과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를 위해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깨달았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네 가지 계열이 있는가? 색(色)을 실답게 알았고, 색(色)의 자라남을 실답게 알았고 색(色)의 소멸을 실답게 알았고 색(色)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실답게 알았다. 수(受)를 … 상(想)을 … 행(行)들을 … 식(識)을 실답게 알았고, 식(識)의 자라남을 실답게 알았고 식(識)의 소멸을 실답게 알았고 식(識)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실답게 알았다.(SN 22.56-집착의 양상 경)


세상과 존재-생명을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선언한 것이 세상에 있는 존재-생명을 위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이라는 것인데, 깨달음의 쓰임새를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불교는 유물론도 배제합니다. 물질만이 본질 요소이고, 마음은 몸에 종속된 것이라는 관점에 대해 사실이 아님, 삶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이해에 닿지 못한 치우친 시각이라는 지적입니다.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사람인 아지따 께사깜발리는 「cātumahābhūtiko ayaṃ puriso - 사람은 사대(四大)로 되어있다.(DN 2-사문과경)」라고 주장하는데, 지(地)-수(水)-화(火)-풍(風)의 물질 요소로써 사람을 정의하는 방법 즉 유물론입니다. 반면에 부처님은 「chadhāturo ayaṃ, bhikkhu, puriso’ti - 비구여, 사람은 육계(六界)로 되어있다.(MN 140-요소의 분석 경)」라고 알려주는데,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식(識)의 여섯 요소입니다. 마음인 식(識)이 물질 요소에 종속되지 않고, 대등하게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라는 설명입니다. 이때, 식(識)은 삶의 과정을 누적하며 변화하는 것이어서 유신론-상견과도 차별됩니다[연기(緣起)된 식(識)].


부처님은 이런 삶의 이야기를 연기(緣起) 즉 십이연기로써 설명합니다. 심(心)이라고도 의(意)라고도 식(識)이라고도 부르는 마음은 유물론적인 단견에도, 유신론적인 상견에도 속하지 않는 연기된 것이고, 따라서, 몸과 마음이 함께한 것으로의 나 또한 유물론-단견에도 적용되지 않고, 유신론-상견에도 적용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 「연기(緣起)된 식(識)의 윤회(輪迴)


이렇게 불교유물론(唯物論)-단견(斷見)과 유신론(有神論)-상견(常見) 모두가 부정된 사실의 자리에서 삶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종교(宗敎)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때, 연기(緣起)된 식(識)(paṭiccasamuppannaṃ viññāṇaṃ)이란 용어는 (MN 38-갈애 부서짐의 큰 경)에서 직접 발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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