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영역에 속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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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영역에 속한 것
『죽으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이 가르쳐준 윤회 이야기』 제2부 스승
| 부처님에게 '이 세상은 있습니까?'라고 질문하면 참 우스운 일입니다.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자리가 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부처님 즉 스승에게 물어서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눈을 뜨고 자신의 삶을 살펴보면 될 일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에게 '저세상은 있습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은 타당합니다. 높은 수행을 통해 자신이 확인하기 전에는 스스로 보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스승은 이렇게 내가 직접 보아 알지 못하는 주제들에 대해 답을 주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질문하여 답을 구하면 안됩니다. 나처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물어보아 답을 구하는 것은 장님들의 행렬과도 같아서 바르게 삶을 향상으로 이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등각(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자)인 스승의 존재 이유가 생겨납니다. 내가 모르는 주제들에 대해 정확히 알고서 답해주기 때문인데,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믿음에 의해 접근해야 하는 주제들이 스승의 영역입니다. 스승의 영역에 속한 주제는 1)본질적 측면에서 아(我)와 무아(無我)에서 시작하는데, '나는 누구인가?'의 문제이고, 2)구체적 현상으로의 죽음의 문제 즉 '죽으면 어떻게 될까?'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정등각인 스승 부처님은 본질적 측면 즉 존재성에서는 무아(無我)의 답을 주고, 현상의 측면 즉 죽음에서는 단(斷)-상(常)을 극복한 '연기(緣起된 식(識)의 윤회'라는 답을 줍니다. ㅡ 「존재성으로의 무아 & 현상으로의 윤회 → 무아와 윤회는 어긋나지 않음!」 스승의 영역에 속한 주제는 스승에게서 답을 찾아 길잡이로 삼아야합니다(믿음 - 견해 - 法洲). 그리고 그 길을 따라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실천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苦滅 - 실천 - 自洲). ; 바른 스승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나는 오직 배워 알고 실천하면 됩니다. 그때, 부처님이 이끄는 행복한 삶이 나에게서 실현됩니다! ; 믿음으로 배워 알고, 실천으로 확인하는 불교 신행(信行)! |
Ⅰ. 죽으면 어떻게 될까? ①스승이 필요합니다 → 있는 그대로 알고(知) 보는(見) 과정에 의해 직접 확인된 사실을 알려주는 스승을 만나야 합니다.
글쎄요,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죽으면 죽음 이후의 형편을 가지고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한계(*)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답이 없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 (DN 23-빠야시 경) 참조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가 될 것입니다. 확인할 수 없음 즉 답이 없는 문제이니 답을 구하지 말고 그냥 살자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이 필요하니 어떤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답을 구하지 않고 그냥 사는 것도 방법이 됩니다. 다만, 확인할 수 없어서 모르는 것일 뿐 죽음 이후의 상황이, 끝이든 아니면 새로운 시작이든,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죽음 이후 닥쳐올 현실에 대비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답을 얻기 위해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도 방법이 됩니다. 그러나 눈으로 직접 확인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현실은 신뢰할 수 있는 답의 선택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 닥쳐올 현실에 대한 대응 능력을 전혀 준비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와 완전한 신뢰가 담보되지 않는 가운데라도 최선의 선택을 하고, 그 선택 위에서 대응 능력을 갖추고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 가운데 어떤 경우를 선택해야 할까요? 어떤 경우가 나 자신에게 더 이익되는 선택일까요?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아무런 대응 능력 없이 죽음을 맞기보다야 완전한 신뢰가 담보되지는 않더라도 어떤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이 최선이라고 믿으며 노력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질문은, 현명한 사람이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지로 넘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죽음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사전은 「(명사) 죽는 일.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을 이른다. <표준국어대사전>」라고 정의합니다.
그런데 누가 죽지요? 그렇습니다. 논리가 필요치 않은 이 질문의 대답은 ‘나’입니다. 내가 죽습니다. 내가 바로 죽음의 당사자입니다. 태어나 살아가고 있다면 누구나 죽어야 하고, 그 가운데서 나도 죽어야 한다는 현실 때문에 사람들도 나도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래서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입니까? 나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말하지 않더라도 나는 내 몸과 내 마음이 함께하여 세상을 만나는 삶의 주인공입니다. 마음 없이 몸 혼자 나라고 말할 수 없고, 몸 없이 마음 혼자 나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몸과 마음 외에 나를 구성하는 다른 요소들은 훨씬 더 철학적 종교적 영역이니 여기에서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좋겠습니다. 다만, 그림 「나는 누구인가? ‒ ‘나’의 개념의 확장」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 이 주제에 대해서는 「초기불교 백일법문(독송 및 개론) - (4-1)khajjanīyasuttaṃ (SN 22.79-삼켜버림 경)[부처님의 용어 정의 - 오온1)](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230612)」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https://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2_13&wr_id=265
이렇게 나를 말할 때, 죽음 즉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은 몸과 마음이 함께한 나에게서 몸이 기능을 잃는 것입니다. 물질로 구성된 이 몸뚱아리가 더 이상 나의 몸으로 기능하지 않게 되면 죽었다고 말하는데, 죽으면 어떻게 될까의 질문은 이 시점에 적용되는 문제 제기입니다.
이렇게 접근하면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몸이 기능하지 않아 죽으면 ①마음도 함께 소멸하여 삶이 완전히 끝나거나 아니면 ②마음은 소멸하지 않고 새로운 몸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나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거나 아니면 죽는다고 해도 마음이 새로운 몸과 함께 새로운 내가 되어 나의 삶을 이어가거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죽은 다음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무책임한 접근이라고 해야 합니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이고, 죽음 이후에 어떤 현실이 닥쳐오든 나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런 무책임한 접근을 허용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①확인되지 않으면서 ②확인하지 않으면 무책임하다는 비난에 처하는 이 곤란한 문제가 바로 ‘죽으면 어떻게 될까?’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그래서 삶에 대해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모면할 수 있게 되는 방법은 있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스승입니다. 내가 보지 못하는 죽음 이후에 대해 바르게 보아 알려주는 스승이 있다면,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사실을 알 수 있고, 그 사실에 맞게 살아가면 삶에 무책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있는 그대로 알고(知) 보는(見) 과정에 의해 직접 확인된 사실을 알려주는 스승을 만나야 한다는 점은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 참 다행히도 세상에는 이 세상과 저세상을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하는, 바른길에 들어서서 바르게 실천하는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십선업(十善業)의 정견(正見)> |
Ⅱ. 죽으면 어떻게 될까? ②스승의 영역에 속하는 것
이 질문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질문이라고 하겠는데, 이 질문에 답을 주는 사람들을 세상에서는 스승 또는 어떤 종교의 교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죽으면 끝이라는 답에 접근하는 사람은 그런 답을 주는 이를 스승으로 선택하였다고 말할 수 있고, 죽음이 곧 새로운 시작이라는 답에 접근하는 사람은 그런 답을 주는 이를 스승으로 선택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질문은 그래서 스승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고, 스승은 ①죽으면 끝이라는 답을 주는 스승, ②죽음이 곧 새로운 시작이라는 답을 주는 스승의 두 부류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몸과 마음으로 구성되고, 몸이 기능하지 않음으로써 죽음을 맞게 되는 이것을 존재(有-bhava)라고 부릅니다. ‘나’는 ‘나’라는 존재인 것이지요. 그래서 ①은 마음이 몸과 함께하는 동안만 존재 상태를 유지하고, ②는 죽음 이후에도 마음이 새로운 몸과 함께 존재의 상태를 이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죽음은 마음이 기준이 되는 존재의 개념으로 연결됩니다.
이때, 죽음 이후에도 새로운 몸과 함께 존재 상태를 이어가는 경우의 마음은 주의해야 하는데, 이 마음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는 마음이 참된 것(我 - 본질/완전/불변/불생불멸)이라는 관점입니다. 참된 것이다 보니 이것이 존재의 중심이고, 몸은 여기에 따라오는 부수적 요소가 됩니다. 부수적인 것으로의 몸과 함께 존재 상태로 있다가 몸의 기능이 다하여 죽으면 참된 것인 마음은, 옷이 낡으면 갈아입듯이, 새로운 몸을 만나 존재를 유지한다는 관점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마음이 참된 것이 아니라는 관점(無我 - 본질 아님/결점(불완전)/변화/생멸)입니다. 참된 것이 아니다 보니 참된 것이 아닌 몸과 대등하게 함께함 즉 몸에 구속되어 비로소 존재 상태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몸의 기능이 다하여 죽으면 참되지 않은 마음은 다시 대등한 구성요소인 몸을 만나고 구속되어서 존재 상태를 다시 형성하게 됩니다.
; 몸에 구속된 마음 & 마음은 몸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 「제1부 제1장 Ⅱ. 죽음과 죽지 않음」 참조(43쪽)
그래서 마음에 대한 관점은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① 이 몸과 함께하는 동안만 존재 상태를 유지하는 마음
② 부수적인 몸과 함께 하고, 존재의 중심인 참된 마음(我 - 본질/완전/불변/불생불멸)
③ 대등한 몸과 함께하여 존재를 구성하는 참되지 않은 마음(無我 - 본질 아님/결점(불완전)/변화/생멸)
이때, ①은 몸이 무너져 죽으면 마음도 소멸하여 존재가 끝난다는 의미로 단견(斷見) 또는 단멸론(斷滅論)이라 불리는데, 자연 과학을 근거로 삶을 보는 유물론(唯物論)으로 대표됩니다.
• 존재에서 벗어남(vibhava)의 주장①[거짓] ‒ 죽음에 의해 소멸함으로써 몸의 구속에서 벗어남
②는 어떤 몸과 함께하든 본질로서의 마음은 변화가 없이 유지되는데, 상견(常見) 또는 상주론(常住論)이라 불리고, 창조주 하나님 브라흐마(梵)의 창조와 그의 분신인 아(我 - attan/atman(*))로써 삶을 설명하는 힌두교(브라만교)가 포괄적입니다.
• 존재에서 벗어남(vibhava)의 주장②[거짓] ‒ 수행을 통해 범아일여(梵我一如)를 실현함으로써 몸의 구속에서 벗어남
③은 몸과 대등하게 함께하여 존재를 구성한 뒤 삶의 과정을 누적하며 변화하는데, 무아(無我)와 연기(緣起)로써 삶을 설명하는 불교(*)입니다.
• 존재에서 벗어남(vibhava)의 주장③[참] ‒ (사념처로 시작하고 사마타-위빳사나로 완성되는) 수행을 통해 무명과 애를 버림으로써 몸으로 가지 않게 되어 몸의 구속에서 벗어남
(*) (SN 12.61-배우지 못한 자 경)은 차리리 몸을 아(我)의 관점에서 접근할지언정 마음은 아我)의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삶에 대한 시각은 결국 마음에 대한 이 세 가지 중 어떤 관점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라고 해야 합니다. ①의 마음을 선택하면 유물론자가 되고, ②의 마음을 선택하면 아(我)의 윤회를 말하는 일반적인 종교 신자가 됩니다. 그리고 ③의 마음을 선택하면 무아(無我)의 윤회를 말하는 불교 신자가 됩니다.
※ 중(中)에 의해 설해진 법(法)을 주제로 하는 (SN 12.15-깟짜나곳따 경)은 연기(緣起)를 바른 지혜로 보면 ①의 마음을 극복하고, 연멸(緣滅)을 바른 지혜로 보면 ②의 마음을 극복한다고 알려줍니다. → 바른 견해의 확립
물론, 선택이 곧 확인은 아닙니다. 선택은 선택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에 의해서 그의 삶은 달라집니다. 선택을 함으로써 그 관점을 선언한 사람을 스승으로 맞이하게 되고, 그 스승이 중심인 종교가 있다면 그 스승을 교주로 하는 종교의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 「삶의 방향성」
이렇게 확인되지 않는 주제는 스승의 선택을 통해 결정됩니다. 그래서 이런 주제는 ‘스승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은 ③무아(無我)의 윤회를 선언한 오직 한 분(*), 정등각인 부처님을 스승으로 하여 결정된 이야기를 정리한 책입니다. 부처님을 스승으로 선택한 사람(**) 즉 불교 신자를 위한 바른 신앙을 안내하기 위함입니다.
(*) 무아(無我)에 접근하는 두 가지 관점
① 아(我)의 산을 오르는 사람과 무아(無我)의 산을 오르는 사람 – 「아산(我山)과 무아산(無我山)」 ☞ nikaya.kr 에서 (241130) 검색
② 세 가지 삶의 방식(소유의 삶-존재의 삶-해탈된 삶) → 소유의 삶-존재의 삶은 아산(我山), 해탈된 삶은 무아산(無我山) ☞ nikaya.kr 에서 (240511) 검색
(**) 「그렇게 법을 보고, 법을 얻고, 법을 알고, 법을 관통하고, 의심을 건너고, 불확실에서 벗어나고, 자기 확신을 얻고, 스승의 가르침에서 다른 스승을 의지하지 않게 됨」(MN 56-우빨리 경) 등
![아산(我山)과 무아산(無我山)으로 이해하는 세상[소유의 삶 → 존재의 삶 ⇒ 해탈된 삶].jpg](https://buddhavada.ivyro.net/data/editor/2602/20260203161500_ce820ec7d8e7a9ca7338b5e00cba4fc0_q49t.jpg)

【참고】 종교 ▶ 해피 스님의 글 「종교는 무엇입니까?」 ⇒ https://buddhavada.com/bbs/board.php?bo_table=buddhavada21&wr_id=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