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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복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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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43회 작성일 25-09-18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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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 & 복전 → 행복한 삶과 하늘에 태어남 butt01.png
 
누가 불교 신자인가? 어떻게 불교 신자가 되는가?

이 질문에 부처님은 의지처인 부처님과 의지처인 가르침과 의지처인 성자들에게 가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그러면 의지처는 무엇입니까?

책 『나는 불교를믿는다』는 불-법-승 바로 알기를 부제로 하는데, 불-법-승 삼보에 대한 바른 앎을 자세히 정리하였습니다.


1. 삼귀의(三歸依) − 불(佛)-법(法)-승(僧) 삼보(三寶)에 귀의함(1)

바야흐로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은 깨달음의 소회를 드러냅니다. 

(SN 6.1-범천의 요청 경)에서 부처님은 ‘내가 성취한 법은 딱까(愛의 형성 과정)의 영역을 넘어선 것(atakk-āvacaro)’이라고 말하는데, 애(愛)의 형성 과정에서 애가 형성되지 않게 함 즉 애멸의 성취를 통한 고멸(苦滅)의 실현입니다.

이어지는 (SN 6.2-존중 경)에서 드러내는 두 번째 소회는 존중과 순응입니다. ―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는 자는 괴롭게 머문다. 참으로 나는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며 머물러야 하는가?”라고.

하지만 부처님은 계-정-혜-해탈-해탈지견의 다섯 가지 법의 무더기(五法蘊)에서 자신을 능가하는 누구도 찾지 못합니다. 부처님의 성취가 완성이기 때문에 완성을 능가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내가 깨달은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러야겠다.”라고 결정합니다.

그렇습니다.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는 자는 괴롭게 머뭅니다. 그래서 완성자인 부처님조차 당신이 깨달은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며 살아가셨습니다.

나는 완성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존중과 순응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존중하고 무엇에 순응하며 살아야 합니까? 내가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 것은 무엇입니까?

참 다행입니다! 나는 불교 신자입니다. 의지처인 부처님과 가르침과 성자들에게로 가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존중과 순응,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 자리를 찾았습니다.

buddhaṁ saraṇaṁ gacchāmi. dhammaṁ saraṇaṁ gacchāmi. saṅghaṁ saraṇaṁ gacchāmi. 
붓당 사라낭 갓차-미. 담망 사라낭 갓차-미. 상강 사라낭 갓차-미.

의지처인 부처님에게로 나는 갑니다. 의지처인 가르침에게로 나는 갑니다. 의지처인 성자들에게로 나는 갑니다.

의지처인 부처님을 존중하고, 의지처인 가르침에 순응하면 됩니다. 앞서 부처님을 만나 삶을 향상한 성자들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면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어디 계십니까? (DN 16.36-대반열반경, 여래의 마지막 말씀)에서 부처님은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선언한 법과 율이 내가 가고 난 후에는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법은 오직 경에 견주어 판단하라 합니다(DN 16.23-대반열반경, 네 가지 큰 기준). 그래서 지금, 부처님은 경에 있습니다. 또한, 경은 그대로 가르침이고, 성자들도 경에 있습니다. 주변에서 성자들을 직접 만날 수 없다면, 경에서 성자들을 만나면 됩니다.

이렇게 경에서 부처님과 가르침과 성자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존중과 순응,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불교 신자의 바른 신행(信行)입니다.

경은 이런 것입니다. 그만큼 경은 정확히,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으로, 그 표현과 의미에 어긋남이 없이 내 곁에 와야 합니다. 그래야 존중과 순응, 의지하여 살아가는 나의 신행이 바르게 부처님이 이끄시는 그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 의지처인 부처님

그러면 부처님은 누구입니까? 누구이길래 우리의 존중할 바 되어 나를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으로 나아가게 합니까? 

여기,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믿음을 가졌다. ‘이렇게 그분 세존(世尊)께서는 모든 번뇌 떠나신 분,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 밝음과 실천을 갖추신 분, 진리의 길 보이신 분, 세상일을 모두 훤히 아시는 분, 어리석은 이도 잘 이끄시는 위없는 분, 신과 인간의 스승, 깨달으신 분, 존귀하신 분이시다.’라고 여래(如來)의 깨달음을 믿는다. — 이것이, 비구들이여, 믿음의 기능이라고 불린다.(2)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이런 분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런 분이라는 믿음으로 확실히 만나고 존중할 때 나를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렇게 삶은 향상합니다.

이런 믿음은 9가지의 덕성으로 구성되는데, 아래 여래구덕(부처님의 9가지 덕성)에서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한 분이 아닙니다. 같은 시대에 두 명의 부처님은 출현하지 않지만, 불교의 역사는 동일한 깨달음에 의한 계보를 형성하며 이어집니다.(3)

최초의 부처님 − 위빳시 부처님(91겁 전에 출현 → 불교 역사의 시작)
이어지는 역사 − 시키 부처님/웻사부 부처님/까꾸산다 부처님/꼬나가마나 부처님/깟사빠 부처님

현재의 부처님 − 고따마 부처님

직후의 부처님 − 멧떼야 부처님(미륵)

특히, 고따마 부처님은 전생에 깟사빠 부처님의 제자였던 기록(4)이 나와서 일곱 부처님이 모두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연결되었을 개연성을 유추케 합니다.

동일한 깨달음에 의한 계보의 형성은 연기/팔정도/칠불통계/이어지는 가르침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확인됩니다(5).

그런데 부처님은 어떤 일을 하신 분입니까? 

부처님은 ‘나는 오직 고(苦)와 고멸(苦滅)을 꿰뚫어 알게 한다.’라고 선언합니다. 괴로움을 완전히 알아서(정체를 밝힘) 소멸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최상위 개념은 고와 고멸입니다.(6)

3. 의지처인 가르침 

법(法-dhamma)은 있는 것입니다. 삼법인은 제법무아를 말하는데, 있는 것은 모두 무아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있는 것의 정체를 밝히고, 있는 것에서 괴로움을 생겨나지 않게 하는 방법도 법인데, 의지처인 가르침의 의미입니다. 

세존에 의해 잘 설해진 법은 스스로 보이는 것이고, 시간을 넘어선 것이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이끌고, 지혜로운 이들에게 개별적으로 알려지는 것이다.(7)
 
법(존재 또는 가르침)은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졌습니다. 자신을 감추지 않는 것이고, 시간의 개념에 제약되지 않습니다. 자신을 감추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있는 곳까지 찾아오면 자신을 드러내어 보여줍니다. 그래서 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시간의 제약 밖에서 오직 지금여기에 집중된 삶을 통해 내 삶은 더욱 좋아집니다. 그렇게 법은 향상으로 이끕니다. 또한, 우빠니샤드가 말하는 불멸성-초월성-우주성과의 동일성(브라흐만=아뜨만)을 가지는 아(我-아뜨만-ātman)가 아니라 연기(緣起)-무아(無我)의 개별적 삶을 이끄는 가르침입니다.(8)

한편, 가르침은 경과 율로 구성됩니다.

• 근본경전연구회의 공부 기준(9)

율장 − 마하 위방가(비구 227계 설명)/비구니 위방가(비구니 311계 설명)
경장 − 디가 니까야/맛지마 니까야/상윳따 니까야/앙굿따라 니까야/쿳다까 니까야의 일부(법구경과 숫따니빠따)

3. 의지처인 성자들

상가는 바라제목차(pātimokkha-戒目-戒本)를 공유하는 공동체입니다. 부처님은 ‘상가에 보시하십시오. 상가에 보시할 때 그대가 가져온 것은 나에게 공양한 것도 되고 상가에 보시한 것도 될 것입니다.’라고 하여 상가에 보시할 것을 권합니다(10). 심지어 ‘미래에 목에 노란 가사를 두르고, 계를 경시하고, 악한 법을 지닌 고뜨라부(become of the lineage 또는 one who destroys the lineage)들이 있을 것이다. 상가를 위하여, 계를 경시하는 그들에 대해 보시할 것이다. 그때도, 아난다여, 상가를 위해 행하는 보시는 헤아릴 수 없고 무량하다고 나는 말한다.(11)’라고도 하는데, 이렇게 상가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함께한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 구성 : ➀범부(성자의 경지에 들어서지 못한 제자들), ➁성자(벗어나는 수행의 과정에서 번뇌들이 일부라도 부서진 제자들)(12)

그런데 상가는 좁은 의미로도 사용된다고 보아야 하는데, 의지처인 상가를 지시하는 경우입니다. 세 번째 의지처는 상가(saṅgha-僧伽)입니다(saṅghaṁ saraṇaṁ gacchāmi 의지처인 상가에게로 나는 갑니다). 그런데 이 상가의 구성이 사쌍팔배(四雙八輩-쌍으로는 넷이고, 홑으로는 여덟인 이들)라고 설명되기 때문에 ‘성자들’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상가를 구성하는 인원 가운데 일부라도 번뇌가 부서져  번뇌의 부서짐의 영역에 들어선 사람들(유학과 무학의 성자들)을 제한적으로 지시하는 것입니다. 

세존의 제자 상가는 잘 실천하고, 세존의 제자 상가는 올곧게 실천하고, 세존의 제자 상가는 방법에 맞게 실천하고, 세존의 제자 상가는 가르침에 일치하게 실천한다. 쌍으로는 넷이고, 홑으로는 여덟인 이들이 세존의 제자 상가이니, 공양받을만하고, 환영받을만하고, 보시받을만하고 합장 받을만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전(福田)이다.

➀쌍으로는 넷이고 홑으로는 여덟인 세존의 제자 상가는 ➁잘-올곧게-방법에 맞게-가르침에 일치하게 실천하고, ➂공양-환영-보시-환영 받을만하며, ➃세상의 위없는 복전이라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상가는 비구 상가와 비구니 상가가 있습니다. 남신자 상가와 여신자 상가는 없어서 출가 제자들의 모임에만 상가라는 자격이 부여된 것을 알 수 있는데, 율장이 마하 위방가와 비구니 위방가로 구성된것과 괘를 같이 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가가  ‘➀쌍으로는 넷이고 홑으로는 여덟인 이들(13)’이라고 서술되는 것은 번뇌를 일부조차 부수지 못한 범부는 의지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의지처인 상가는 상가 안에서 유학과 무학의 성자들만을 제한적으로 지시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특히, 이런 상가에 대해 복전(puññakkhetta)이라고 말하는데, 주어진 보시를 씨앗으로 싹틔워 큰 결실로 돌려준다는 의미입니다(14). 보시의 청정으로도 나타나는 이 의미는 불교를 다른 종교와 차별하는데, 부처님 가르침 안에서 복전인 성자들에게 하는 보시는 받는 자에 의해 크기가 결정되고, 그렇지 못한 보시는 주는 자에 의해 결정된다고 설명합니다(15).

예류과의 실현을 위해 실천하는 사람 즉 예류도의 성자는 번뇌의 일부가 부서지기 시작하여 유학의 반열에 오른 첫 단계의 성자인데, 이들에게 하는 보시는 헤아릴 수 없고 무량한 결실이 기대된다고 하고 이어서 아라한에 이르기까지는 ‘말해 무엇할 것인가!’라고 설명합니다(16). 사쌍팔배의 성자들이 복전이어서 그 밭에 뿌려진 보시의 씨앗이 성자 아닌 자들(범부)에게 주어진 보시에 비해 헤아릴 수 없이 큰 결실을 돌려준다고 알려주는데, 이런 성자들이 ➂공양-환영-보시-환영 받을만하며, ➃세상의 위없는 복전이라는 것입니다. 

복전인 성자들에 대한 가르침은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에서도 발견되는데, 전생에 웰라마 바라문이었던 시절에 큰 보시를 하였지만, 그때는 보시 받을만한 분 즉 성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의 보시를 청정하게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17)
 
4. 행복한 삶과 하늘에 태어남

의지처인 부처님과 가르침과 성자들에게로 가는 것은 공덕을 쌓고, 유익을 쌓고, 행복의 자량이 되고, 하늘로 연결되고, 보(報)가 행복이고, 하늘로 이끄는 것인데,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이익과 행복으로 이끕니다(18).